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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화두11: 향엄의 춘행동령(春行冬令)

취산 2019.06.04 11:40 조회 수 : 12

출처: http://cafe.daum.net/golim

 

화두11: 향엄의 춘행동령(春行冬令)

 

향엄이 법문을 열어 보일 때에 (스승) 위산께서는 한 스님을 통해 보낸 서신과 주장자를 보내왔다. 향엄이 받고서는 말했다.

“창천! 창천!”

이 스님이 곧 물었다.

“화상께서는 어째서 그렇습니까?”

향엄이 말했다.

“봄에 동령(冬令)을 행한다.”

香嚴開法時溈山遣僧送書并拄杖到。嚴接得曰蒼天蒼天。僧便問和尚為甚如此。嚴曰只為春行冬令。(一作冬行春令)。

 

‘법문을 열어 보일 때’라는 것은 곧 저 향엄스님이 오래도록 은거하고 나서 마침내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법문을 시작한 때를 말한다.

이 화두에 다가가려면 먼저 지난날의 향엄스님이 깨달은 바를 살펴야 한다. 일찍이 향엄스님은 백장선사 회상에서 총명함을 보였으니,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는 자였다. 마침내 백장선사께서 열반하시고 백장선사의 법을 이은 위산선사 회상에 머물게 되었는데, 한번은 위산선사께서 물었다.

“그대는 백장스님이 계실 때,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할 만큼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의해식상(意解識想: 뜻으로 풀고 의식을 가지고 생각함)은 생사의 근본이다. 부모미생시(父母未生時: 부모가 낳기 이전)를 시험 삼아 한 구절 일러봐라.”

師。一日問香嚴。我聞。汝在百丈先師處。問一答十。問十答百。此是汝聰明靈利。意解識想。生死根本。父母未生時。試道一句看。

 

생사의 근본이란 곧 가짜 자신을 참 자신으로 안다면 그것이 곧 생사윤회를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해식상(意解識想: 뜻으로 풀고 의식을 가지고 생각함)’이란 곧 제7식 말라식으로 나 자신의 진면모를 풀어내고 제8식 아뢰야식으로 나 자신의 참된 면목, 진아, 나의 참성품을 짐작하며 더듬는 것을 일컫는다.

이 말은 곧 6식, 7식, 8식을 뛰어넘어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보라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느끼는 나라고 하는 자의식은 곧 6식에 해당한다. 밥을 먹을 때 나는 지금 밥을 먹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는 그 자신인 것이다. 고요함속에서 의식 그 자체라고 느껴지는 그것은 곧 7식에 해당한다. 그 의식 자체는 제8식의 신성하고 보편적인 존재성과 현실적인 자의식 사이에 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몸이 없다는 것이며 6식과 8식을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누군가가 생사의 근본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세 가지 의식을 깊이 꿰뚫어서 여기에 더 이상 현혹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 나아가서 다섯 가지 식 즉 오식을 깊이 살펴야 한다. 오식이란 곧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을 말한다. 안식은 눈으로 보는 것을 담당하는 주체이고, 이식은 소리를 듣는 것을 담당하는 주체이고, 설식은 음식의 맛을 담당하는 주체이고, 신식은 몸으로 느끼는 차가움과 더움, 부드러움과 거칠음을 담당하는 주체이다. 정리하면 곧 ‘의해식상이 생사의 근본’이라는 말은 곧 여덟 가지 의식으로는 참된 자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찌감치 그것들을 통해 본래면목을 더듬을 생각을 버리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어찌 아무 것도 모른 채 버릴 수 있을 것인가? 백천번 가르침을 따라 맛을 보고 겪어보면서 어느 순간 문득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부모미생시(父母未生時)라는 것은 이 몸이라는 과보를 받기 이전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말하는 몸이란 단순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신(保身) 화신(化身) 또한 몸이고, 변역생사의 몸 또한 몸이고, 분단생사 또한 몸이기 때문이다.

 

일체를 훌훌 벗어던지지 않고서 어찌 참된 자신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향엄스님은 물음을 받고 망연자실하여 돌아가서 그동안 보았던 (여러 경전과 논소들의) 문자들을 뒤졌지만 끝내 한 구절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탄식하며 말했다.

“그림의 떡으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구나.”

그리고는 위산스님에게 설해줄 것을 청하였다.

위산스님이 말했다.

“내가 설한다면 그대가 나중에 나를 욕하고 갈 것이다. 내가 설한다면 그것은 나의 일이지 끝내 그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향엄스님은 그동안 보았던 모든 글자(경전, 논소, 가르침의 글)들을 태워버리고는 말했다.

“이번 생에는 불법을 배우지 않겠다. 돌아다니며 밥이나 축내며 심신이나 편하게 하며 지내리라.”

그리고는 위산스님을 하직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는 마침 남양(南陽)을 지나면서 혜충국사의 탑을 참례하게 된 것이다.

 

그의 역량이라면 충분이 물에 빠져도 입은 동동 떴을 것인데, 어째서 저 향엄스님은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에 대해서 대답하지 못했을까? 사람의 입이란 그만한 지경에 이르지 않으면 닫아두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글자로 살피는 교학과 도의 이치에 매우 밝았음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향엄스님은 혜충국사의 탑에 이르러 기와조각을 던져서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에 활짝 깨닫고서 게송을 지어서 위산스님에게 서신으로 전하였다.

 

그가 혜충국사의 탑에 이르렀다는 것은 곧 그곳에 가서 국사의 탑에 예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는 주변을 정리하고 흩어진 기와조각들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것이 곧 그가 말한 ‘돌아다니며 밥이나 축내며 심신이나 편하게 하며 지내리라.’라고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흔히 보통사람이 크게 자신에 대해 실망했다면 방탕하게 보내며 그저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이나 마시고 번민하고 방황하며 스스로를 달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옛 사람을 향해 혼신을 다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가 어떤 깨달음을 했는지 보자.

 

한 차례 부딪침에 아는 바를 잊으니

다시 닦는 시절을 빌리지 않는다.

거동을 움직여 옛 길에 오르지만

초연기(悄然機: 고요한 기틀)에 떨어지지 않는다.

곳곳에 자취가 없고

소리와 빛깔 밖의 위의(威儀: 위엄과 품위를 갖춘 모습)이다.

제방에 도를 통달하는 자는

(이것을) 모두 상상의 기틀이라고 한다.

一擊忘所知。更不假修時。動容揚古路。不墮悄然機。處處無蹤跡。聲色外威儀。諸方達道者。咸言上上機。

 

여기에 대해서 앙산스님은 몸소 찾아가서 다시 게송을 지어보라고 하였다. 이에 향엄스님이 송하였다.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금년의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작년의 가난은 송곳을 꽂을 땅이라도 있더니

금년의 가난은 송곳도 없다.

去年貧未是貧。今年貧始是貧。去年貧有卓錐之地。今年貧錐也無。

 

그러자 앙산스님이 말했다.

“사제가 여래선은 알았다고 하겠으나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

仰山云。如來禪。許師弟會。祖師禪。未夢見在。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을 본다.

만약 사람이 알지 못했다면

따로 사미를 불러라.

我有一機。瞬目視伊。若人不會。別喚沙彌。

 

여기에서 앙산스님은 향엄스님이 조사선을 알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만약 이상의 내용을 충분히 살폈다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저 향엄스님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이다.

 

향엄이 법문을 열어 보일 때에 (스승) 위산께서는 한 스님을 통해 보낸 서신과 주장자를 보내왔다. 향엄이 받고서는 말했다.

“창천! 창천!”

이 스님이 곧 물었다.

“화상께서는 어째서 그렇습니까?”

향엄이 말했다.

“봄에 동령(冬令)을 행한다.”

 

여기에서 ‘창천(蒼天)’이란 봄의 하늘을 가리킨다. 만물이 앞을 다투며 푸르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름의 하늘은 호천(昊天), 하늘의 하늘은 민천(旻天) 겨울의 하늘은 상천(上天)이라고 부른다. 저 향엄스님이 여기에서 두 차례 ‘창천, 창천!’이라고 한 것은 곧 봄 하늘을 향해 곡소리를 낸 것이다. 어째서 그는 곡소리를 냈을까? 이는 곧 저 위산선사의 심부름으로 온 저 스님을 의아스럽게 하였다.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향엄스님의 반응을 그대로 다시 위산선사에게도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상께서는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것은 흡사 병사가 장군에게 묻는 것과 같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병사는 도장을 따라서 돌고 장군은 신표를 따라서 움직인다.’라고 하였다.

향엄스님은 말했다.

“봄에 동령(冬令)을 행한다.”

여기에서 동령(冬令)이란 곧 겨울, 내지는 겨울의 날씨를 뜻하는데, 좀더 확대해석하면 곧 겨울이라는 계절을 관장하는 (계절의 신이나 왕의) 행정집행명령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영(令)이란 곧 24절기가 시행되는 뜻하는 바와도 통한다고 하겠다. 

여기에 대해서 옛 선사께서는 게송하였다.

 

주장자를 받고 창천에 곡하였으니

(소리가) 끊어진 이후(絕後) 광채 이전(光前)을 말해서는 안 된다.

봄에 가을의 법령을 행함을 사람들이 알기 어려우니

짚신을 떨어뜨리며 발바닥을 뚫는다. (정각 일)

接得杖哭蒼天。不言絕後與光前。

春行秋令人難會。踏破草鞋腳底穿。(正覺逸)。

여기에 대해 한 구절을 적는다.

 

오래도록 덕산스님을 생각했으니

아버지의 주장자를 받고

애증(愛憎)으로 높은 옥 베개를 적시었다.

봄에 겨울의 법령을 행함이여

지음(知音)이 투합하면 양춘설곡(陽春雪曲)인데

오이는 달고 조롱박은 쓰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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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afe.daum.net/golimwon/oVo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