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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화두12: 향림의 조사서래의

취산 2019.06.06 11:08 조회 수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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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12: 향림의 조사서래의

 

한 스님이 향림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하고 분명한 뜻입니까?”

“오래 앉으면 피로를 이룬다.”

“곧장 몸을 돌릴 때는 어떻습니까?”

“깊은 구덩이에 떨어진다.”

益州青城香林院澄遠禪師(嗣雲門)僧問。如何是西來的的意。師曰。坐久成勞。曰便回轉時如何。師曰。墮落深坑。

 

선(禪)의 세계에서는 예로부터 끊임없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어왔다. 여기에서 조사는 곧 달마대사를 일컫는다. 왜냐하면 인도의 역대 28대조사들 가운데 오직 달마대사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기 때문이다. 마하가섭은 1대 조사가 되고 보디달마는 28대 조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중국에서 6대 조사가 이어진다. 따라서 6조 혜능조사는 33대 조사가 된다.

저 위대한 물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불교풍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남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중국에는 이미 승조법사(僧肇法師: 384~414)의 스승인 구마라즙(鳩摩羅什)을 비롯하여 실차난타(實叉難陀), 대이삼장(大耳三藏) 등 많은 훌륭한 스승들이 들어왔었다. 삼장(三藏)이란 곧 경율론(經律論: 경, 계율, 논)을 깊이 통달한 스승을 일컫는 호칭이다. 경(經)이란 부처님께서 설하는 경전을 말하고 론(論)이란 보살이 경에 주석을 붙인 것을 말한다. 참고로 소(疏)란 경전에 해박한 고승대사가 지는 주석을 말한다. 예컨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마명보살이 지었다면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원효대사가 찬술한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조사서래의를 물을 때는 저 달마 이전의 스승들이 전한 불법의 뜻과 달마조사가 전한 뜻이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를 묻는 뜻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마대사의 모습은 이전의 스승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9년 동안 그저 벽을 보고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전하기 위해서 이 동토에 온 것일까? 어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상대가 가볍게 보는 자라면 결코 이러한 의문을 가질 수 없는 일이다. 교학을 깊이 공부하면 할수록 이러한 의문은 깊이 사무치게 될 것이다. 그런 자라면 마침내 문을 박차고 나와 육환장을 손에 들고 삿갓을 쓰고서 멀리 흰 구름을 따라 직접 선사를 찾아뵙고 묻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구름 따라 물을 따라 정처 없이 남쪽으로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한 스님이 향림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하고 분명한 뜻입니까?”

“오래 앉으면 피로를 이룬다.”

“곧장 몸을 돌릴 때는 어떻습니까?”

“깊은 구덩이에 떨어진다.”

 

여기에서 ‘분명하고 분명한 뜻’이란 ‘적적의(的的意)’을 번역한 것이다. 결국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달마가 중국에 온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물론 이 스님은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만난 일화도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삼장의 이치를 깊이 살피고 살폈음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이미 그렇다면 더 이상 의문이 없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선사를 찾아왔을까? 평생토록 삼장을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부족해서 다시 길을 떠났을까? 이미 대승소승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다시 그 뜻을 제대로 아는지 확인하고 그 뜻을 극진히 하기 위해 보살이 붙인 주석서를 거듭해서 살피고 율장(律藏)으로 언행을 가다듬어서 부처의 행을 그대로 본받는 것을 실천하려는 것이 모든 불교 수행자가 밟아가는 길이다. 이는 곧 그가 불교에 대해서 아는 지식과 이해, 실천이 흘러넘칠 정도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 그가 육환장을 쥐고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애초에 길 조차도 떠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런 자가 마침내 향림선사가 계시는 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하고 분명한 뜻입니까?”

이 질문 하나에 그의 평생이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옆에서 이것을 가볍게 본다면 참으로 경솔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분명하고 분명한 뜻(的的意)’이라고 묻는 것은 저 묻는 자의 뜻 또한 아득하여 일반적인 배움으로는 알기 어렵다는 함축도 있는 것이다. 설령 성문 아라한이라고 할지라도 이 물음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저 10보살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까?

저 향림선사는 일찍이 운문선사를 참례하여서 18년을 시봉하고 다시 3년을 머물고서야 향상의 도리를 깨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운문선사의 기틀과 역량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굴리는 하나의 구절 속에는 운문선사의 삼구(三句)가 그대로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운문의 삼구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볼 날이 있을 것이다.

 

저 스님의 물음에 향림선사는 곧 말했다.

“오래 앉으면 피로를 이룬다.”

여기에 대해 어떤 자는 말할 것이다. “그렇지! 달마대사가 구년면벽을 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러한 이해로 어찌 향림선사에게 다가갈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조사서래의에 대해서 많은 질문이 있었고 대답이 있었다.

조주선사는 말했다.

“정전백수자, 즉 뜰 앞에는 잣나무이다.”

 

그러자 이 스님이 다시 물었다.

“곧장 몸을 돌릴 때는 어떻습니까(便回轉時如何)?”

 

‘곧장’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지금까지의 행리를 바꾼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몸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반대로 만약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면 어떠할까?

그러기 때문에 옛 사람은 말하기를, 병사는 도장을 따라서 돌고 장군을 신표를 따라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향림선사는 말했다.

“깊은 구덩이에 떨어진다.”

자, 이것은 좋은 일인가? 좋지 않는 일인가? 이제 당장 앉는 것을 그만둔다면 그것은 좋은 일인가? 좋지 않는 일인가? 무엇을 깊은 구덩이라고 하는가?

이제 향림선사의 화두에 대해 마무리를 하자. 여기에 대해 옛 사람은 게송하였다.

 

一箇兩箇千萬箇。脫卻籠頭卸角馱。

左轉右轉隨後來。子湖要打劉鐵磨。(雪竇顯)。

 

해인사 장경각 출판의 「벽암록」에서는 이렇게 번역하였다.

 

한 사람 두 사람 천만 사람이여

굴레를 벗고 무거운 짐을 부렸구나.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며 뒤를 따르니

자호스님이 유철마를 때릴 수밖에 없었구려.

 

나 취산이라면 이렇게 번역하겠다.

 

한 사람 두 사람 천만 사람이

(등에 실은) 대바구니를 벗고 뿔에 실은 짐을 내려놓으면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며 뒤를 따르는데

자호가 유철마를 때릴 만도 하였다. (설두 현)

 

잠시 다른 일화를 보자.

 

용아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석오구(石烏龜: 검은 돌 거북)가 말을 알면 그대에게 말해주겠다.”

“석오구가 말을 합니다.”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龍牙因僧問。如何是祖師西來意。牙曰待石烏龜解語即向汝道。曰石烏龜語也。牙曰向汝道什麼。

 

무엇이 저 석오구일까? 자 말해보라. 그대가 분명 돌거북이 말을 한다고 했으니, 이제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 그대는 그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가? 정말 들었다면 어찌 말하지 못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 천동 각선사는 말했다.

“한 구절을 우러르면 (한 구절이) 더욱 높고 한 구절을 뚫으면 (한 구절이) 더욱 견고하다. 한 구절을 바라보면 (한 구절이) 앞에 있는데, 한 구절이 문득 뒤에 있다면 가려낼 수 있겠는가? 적심편편(赤心片片: 붉은 마음이 조각조각임)을 아는 사람이 드물고 도면퇴퇴(覿面堆堆: 겹겹으로 쌓였음을 마주해도)를 엿보는 자가 드물다.”

 

여기에 대해 적어본다.

적심편편이여

황하의 아홉 굽이 물길이다.

도면퇴퇴여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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