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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화두17: 조주의 무빈주화(無賓主話)

취산 2019.06.18 13:16 조회 수 : 7

출처: http://cafe.daum.net/golim

 

 

화두17: 조주의 무빈주화(無賓主話)

 

조주는 대중에게 말했다.

“내가 (30년 전) 행각으로 남방에 갔다. (당시에 나 조주) 화로두(火爐頭: 불을 담당하는 소임)에게 저 무빈주(無賓主) 화두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

趙州謂眾曰。我向行腳到南方。火爐頭有箇無賓主話。直至如今。無人舉著。 

 

조주선사께서는 한 때 남방으로 가서 행각을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법문을 할 때는 북쪽 황하강 북쪽의 하북성에 머무는 때라고 추측이 된다. 그곳이 어쩌면 조주(趙州)인지도 모른다. 그가 남방에 머물 때에 선원에서 노두(爐頭) 소임을 맡나보았는데, 이는 곧 화로를 담당하는 소임을 맡은 스님을 일컫는다. 당시에 선원에서는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화로를 설치해 장작을 준비하고 실내를 따뜻하게 하는 소임을 두었던 것이다. 혹독한 추위에 화롯불만큼 요긴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저 혜가스님은 눈이 허리까지 차는 곳에 서서 달마조사에게 불법을 물었다.

또한 ‘노파소암’의 화두에서 암주는 차가운 곳에 서서 노래하였다.

“한 겨울의 삼동에 찬 바위에 마른 나뭇가지가 기대였으니, 따뜻한 온기가 전혀 없다.”

 

조주선사는 ‘무빈주화(無賓主話)’에 대한 다른 부연적인 설명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직 이 네 글자만을 들어서 여기에 대해 30년 동안 내게 와서 묻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내지는 설령 물었다고 해도 제대로 아는 자가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빈주화(無賓主話)’를 글자 그대로 푼다면 ‘손님과 주인이 없는 이치’에 관한 화두를 의미한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집에 찾아온다면, 나는 주인이 되고 찾아오는 자는 손님이 된다. 어떤 선객이 선사를 찾아왔다면, 선사는 주인이고 선객은 손님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 구지선사가 암자에 살고 있을 때에 실제(實際)라는 비구니가 와서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선사의 선상을 세 바퀴 돌고는 주장자를 우뚝 선사 앞에 세우고 서서 말했다. “화상께서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삿갓을 벗겠습니다.” 선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니 비구니는 그냥 떠나려고 했다. 이에 선사는 말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하루 저녁 묵어가도록 하시오.” 비구니가 말했다. “제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묵어가겠지만 대답을 못하시면 이대로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떠나 가버렸다.

이때 선사는 혼자 탄식하였다. “나는 명색이 사문(沙門)이라고 하면서 비구니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외람되이 장부의 형상은 갖추었으나 장부의 작용이 없구나! 이 산을 떠나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리라.” 그리고 조용히 선정에 드니 갑자기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삼(三), 오(五)일 안에 큰 보살이 오셔서 화상께 설법해 드릴 것이요.” 그런지 열흘이 지나지 않아 천룡 화상이 왔거늘 선사는 뛰어나가 말에 절을 하고 맞아들여 모시고 서서 앞에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한 즉 천룡 화상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니 즉시에 환히 불법을 깨달았다.

 

저 실제 비구니가 두 차례 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어찌 두 가지 질문이 있을 것인가? 오직 불법일 뿐인 것이다. 사문(沙門)이란 곧 공로(功勞) 즉 공을 들이고 노력하는 자를 일컫는다. 왜냐하면 부처의 도를 닦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번뇌를 쉰 자(息), 마음을 쉰 자(息心), 깨끗함에 뜻을 두는 자(靜志), 고요함에 뜻(淨志)을 두는 자, 내지는 부처의 도에 모자람이 있는 자(乏道), 부처의 도에 가난한 자 즉 빈도(貧道) 등의 뜻이 있다.

여기에서 주인은 구지스님이고 손님은 실제비구니이다. 여기에서 주인은 오히려 손님에게 간파를 당하는 처지이다. 이것을 임제종에서는 객이 주인을 간파하다. 즉 객간주(客看主)라고 부른다. 내지는 객중주(客中主)가 되겠다. 손님이 오히려 주인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주선사께서는 ‘무빈주화(無賓主話)’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30년 동안 아무도 흡족한 답을 주는 선객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다는 것은 곧 주인이 곧 손님이고 손님이 곧 주인이기 때문이다. 결국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인 즉 죽이는 말인데, 나는 묻고 싶다.

부처가 곧 중생이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오늘날 이 말을 누구나 쓰지만 가볍게 쓰면 가벼움을 얻고 무겁게 쓰면 무거움을 얻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도 부처와 중생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별을 보고서 비로소 큰 깨달음 얻고서 한 구절을 토하셨던 것이다.

「불조강목(佛祖綱目)」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세존께서는 계미년 납월(臘月: 2월 7일)에 삼매에 들어 8일 명성(明星: 금성)이 뜨는 때에 홀연히 큰 깨달음을 하여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하시고는 탄식하며 말하셨다.

“기이하구나! 일체중생이 여래의 지혜(智慧)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었구나.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능히 증득하지 못했을 뿐이다.”

癸未二月七日之夕。入正三昧。二月八日明星出時。廓然大悟。成正等覺。嘆曰。奇哉一切眾生。具有如來智慧德相。但以妄想執著。不能證得。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이렇게 얻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조주선사의 ‘무빈주화’와 이것이 무슨 상관이라는 것인가?

 

조주선사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삼십년 전에 ‘무빈주화’를 제기했는데, 여기에 대해 아무도 말하는 자가 없다.”라고 하셨다.

 

여기에 대해 이렇게 한 자 적는다.

 

무빈주화여

공자는 글자를 알지(識) 못하고

달마는 선을 회(會)하지 못하였다.

경산에게는 문무화(文武火)가 있었으니

큰 모자를 뒤집어쓰고 기름병을 들었다.

 

다시 한 글자 적는다.

 

멀고 가까움을 묻고자 한다면

미륵을 참례해야 하리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어찌 문수를 지나치리오.

이제 관음보현 마주해서는 무얼 물어야 할까?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무빈주화 #사빈주 #노파소암 #조주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