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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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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말후구를 살피다

하루는 재(齋)가 늦어지자(晚), 덕산이 탁발(托缽: 발우를 들고)하며 법당(法堂)으로 내려갔다.
이때 설봉이 (반두(飯頭: 밥 짓는 소임)을 맡았는데) 보고서는 곧 말했다.
“종도 울리지 않았고 북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이 늙은이가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는가?”
덕산은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설봉이 (이것을) 암두에게 말하자, 암두가 말했다.
“저(大小) 덕산이 말후구를 모르는구나.”
덕산이 듣고는 시자로 하여금 불렀는데, 암두가 방장실에 이르자 물었다.
“그대는 노승을 긍정하지 않는가?”
(그러자) 암두가 그 말(語)에 대해서 밀계(密啟: 비밀하게 열다)하였다.
덕산이 다음날 상당하였는데, 평소와는 같지 않았다.
암두가 승당(僧堂) 앞에서 박수를 치며 크게 웃으며 말했다.
“늙은이가 말후구를 알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구나. 이후로는 천하 사람들이 그를 어찌하지 못하리라. 비록 그렇지만 3년뿐이로다.”(과연 삼년에 입적하였다.)
雪峰在德山會下作飯頭。一日齋晚。德山托缽下至法堂。(時雪峰作飯頭。見便云。這老漢。) 峰云。鐘未鳴鼓未響。這老漢。托缽向什麼處去。山無語低頭歸方丈。雪峰舉似巖頭。頭云。大小德山。不會末後句。山聞令侍者喚至方丈問云。汝不肯老僧那頭密啟其語。山至來日上堂。與尋常不同。頭於僧堂前。撫掌大笑云。且喜老漢會末後句。他後天下人。不奈他何。雖然如是。只得三年。(師果三年而沒。) 

 

법문이 평소와는 같지 않았다고 했는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을까?

옛길에 발을 내딛어서는 더이상 옛 사람을 구박하지 않는다.


성철스님의 법문을 모아 엮는 <본지풍광>의 첫 번째 공안이 바로 덕산탁발화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거론하는 것은 염화미소이다.
금세기에 한국의 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을 꼽으라면 당연히 퇴옹 성철스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장좌불와를 행하고 돈오돈수, 오매일여를 역설하여서 제방의 입들을 막았다.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떤 경지에 이르고 어떤 안목을 갖추었는지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성철스님은 덕산탁발화를 거론하며 결론에 이르러서 말하였다.
“대중들이여, 이들 공안을 총림에서는 흔히들 논란하지마는 산승의 견처로 점검해 보니, 덕산의 삼부자(三父子)가 말후구는 꿈에도 몰랐고 설두의 사족은 지옥에 떨어지기 화살과 같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말후구인가?”
양구하고 나서 말하였다.
“물소가 달을 구경하니 문채가 뿔에서 나고
코끼리가 뇌성에 놀라니 꽃이 이빨 사이에 들어간다.” (성철스님 번역)
犀因翫月紋生角。象被雷驚花入牙。

중국 호국 징 선사의 구절을 인용하셔 보인 것은 참으로 적절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인용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살피려야 할 것은 바로 지금부터이다. 왜냐하면 성철스님의 안목을 엿보려면 한자 원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직접 번역한 한글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호국 징 선사의 견처와 다름없는 견처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까?
저 14 글자는 참으로 입을 대기가 어렵다. 백천 번을 뒤집으며 화두를 타파해가는 치열함이 없다면 끝내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리라. 애초에 이것은 글자를 뒤적거려서 명쾌함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반드시 조사의 가시밭길을 꿰뚫을 수 있는 역량을 필요로 한다.  
나라면 이렇게 번역했으리라.

犀因翫月紋生角。象被雷驚花入牙。
코뿔소가 달을 구경한 것으로 인하여 주름에서 뿔이 생기고
코끼리가 천둥소리에 놀라니 꽃이 상아로 들어간다.

이 두 구절은 두 가지 경계를 매우 분명하게 보였으며 결코 뒤섞어도 뒤섞여지지 않는다.
코뿔소가 달을 구경했다는 것은 곧 수없이 물속의 달을 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름에서 뿔이 생겼다는 것은 어린 코뿔소가 시행착오를 하며 일체의 성색을 물리치고 꿰뚫고 지나가는 역량을 길렀다고 하겠다. 이른바 사대와 오온이 공하여서 일체에 머물 바가 없음을 깊이 체득해가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럴 수 있으리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저 물속의 달을 진짜 달로 알았는가?  
삼현십성(三賢十聖)이 세존이 연꽃을 들었어도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것이 어찌 우연이리오. 오직 가섭만이 미소했으니, 세존께서 말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불입문자가 있는데, 가섭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하였다. 당시 영산회상에는 십만의 성중(聖衆)이 있었으며 이것은 석가세존의 49년 설법에서 최후의 즈음의 일이다.
여기에서 저 뿔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옛 사람의 구절을 살피는 데는 반드시 글자 속에서 분명하게 옛사람의 견처를 꿰뚫어보는 것으로 탁마와 점검의 극칙으로 삼지 않으면 결국 심증을 얻었어도 물증에서 길을 헤매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혀가 짧아서가 아니라 그만큼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꿰뚫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성철스님은 ‘물소가 달을 구경하니 문채가 뿔에서 나고’라고 했는데, 과연 호국 징 선사와 부합할 수 있었을까? 물소와 코뿔소를 혼용하고 있는데, 저 물소의 뿔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법구경에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가라’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무소를 물소라고 해야 맞겠는가?
저 뿔은 오히려 다음의 일화에서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한번은) 설봉스님이 말했다.
“저 조사는 용두사미이다. 스무 방망이를 때려야 하겠다.”
(당시에) 부(孚)상좌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이빨을 딱딱거렸다.
설봉스님이 말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스무 방망이를 맞아야겠다.”
雪峰云。大小祖師。龍頭蛇尾。好與二十棒。
孚上座侍次咬齒。
峰云。我與麼道。也好與二十棒。

설봉선사는 어째서 ‘저 조사는 용두사미이다’라고 했을까?
그것은 곧 육조혜능께서 말했던 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라는 구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구절이 용두사미라는 것이다.
어째서 용두사미인가? 절반은 조사의 뜻에 부합하고 절반은 여래의 뜻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때 부상좌가 이빨을 딱딱 거렸는데, 이것이야 말로 코뿔소가 뿔을 세운 도리인 것이다.
어째서 그러하는가? 수없이 물속의 달을 건져 보고서야 비로소 그만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사의 뜻을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참으로 멀고도 멀다.
여기에 대해서 설봉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스무 방망이를 맞아야겠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저 설봉선사는 말후구를 꿈엔들 보았을까?
애초에 성철스님은 호국 징 선사의 구절을 인용했었다.

어떤 스님이 호국 수징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본래심(本來心)입니까?”
“코뿔소가 달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인하여 문(紋)에서 뿔이 생기고
코끼리가 천둥소리에 놀라니 꽃이 상아로 들어간다.”
護國澄因僧問。如何是本來心。
師曰。犀因翫月紋生角。象被雷驚花入牙。

이제 다시 성철스님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한 저 호국선사는 본래심을 꿈엔들 보았을까?  
무엇을 본래심이라고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화두를 분명하게 꿰뚫지 못해서는 그저 뇌를 더욱 복잡하게 할 뿐이리라.
설령 본래심을 열반묘심이라고 해도 또다시 의문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여래선과 조사선은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어떻게 해서 같고 다르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 다른가?
일찍이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선교석>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귀조사설>이 아니라 하더라도 교외별전법인 조사선의 수승한 특수성을 입증할만한 논거들은 충분히 많다. 굳이 교외별전법을 강변하기 위하여 석존께서 증득하신 법이 조사심인을 갖추지 않은 원극치 못한 법이라고 분별 하여 여래선과 조사선의 우열을 나누는 것은 종문의 법에도 어긋난 것이다.’ (선교결)

구지 누군가가 교외별전법을 강변했다면 그것은 곧 여래선을 살피는 자의 병폐를 지적하는데 그쳐야 하리라. 여래의 뜻과 조사의 뜻이 다르지 않다고 한 성철스님의 뜻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수긍할 수도 없다. 어째서인가? 여기에서는 반드시 지(知)와 회(會)의 차이를 살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교의(敎意)와 조의(祖意)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조의(祖意)를 알면 교의(敎意)를 안다.”
한 풍혈선사에게 물었다.
“교의(敎意)와 조의(祖意)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닭은 추우면 지붕위로 오르고 오리는 추우면 물속으로 들어간다.”

만약 교의(敎意)와 조의(祖意)가 같다고 한다면 조의(祖意)를 땅속에 파묻는 것이다.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석가세존을 땅속에 파묻는 일이다. 분명하게 살필 수 있어야 부처와 조사를 욕되게 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곧 본래심을 거론하는 일과 정확히 같다.
무엇을 본래심이라고 하겠는가?
본래면목인가? 조사심인인가? 아니면 여래의 열반묘심인가? 여래선인가? 조사선인가? 석가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대오를 했는데, 그것은 본래심인가? 아닌가? 세존께서 연꽃을 들고 가섭에게 부촉했는데, 그 부촉한 바는 보리수 아래에서 대오한 것과 같은가? 다른가?
백 가지로 말을 비틀어도 가지런히 정리해서 한 줄기를 뽑아낼 수 있어야 묘함을 얻는다고 하겠다.
저 호국 징 선사의 본래심을 살피려면 이 모든 것을 명쾌하게 꿰뚫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저 성철스님은 이것을 어떻게 살폈을까? 이는 곧 번역의 글로 다소 엿볼 수 있다.

“물소가 달을 구경하니 문채가 뿔에서 나고
코끼리가 뇌성에 놀라니 꽃이 이빨 사이에 들어간다.” (성철)

이러한 문제는 그대로 협산의 경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협산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협산의 경계입니까?”이에 협산은 말했다.
“猿抱子歸青嶂後(裡)。鳥銜花落碧巖前”。

후에 법안은 말했다.
“내가 20년을 그저 경계를 짓는 말로 알았다.”
夾山因僧問。如何是夾山境。
師曰。猿抱子歸青嶂後(裡)。鳥銜花落碧巖前。
後來法眼云。我二十年祇作境話會。

여기에 대해서 성철스님은 <본지풍광> 70칙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으로 돌아가고,
새는 푸른 바위 앞에서 떨어진 꽃잎을 물고 오네.’
猿抱子歸青嶂後,鳥銜花落碧岩前。

저 새는 어째서 떨어진 꽃잎을 입에 물었을까? 바로 여기에는 법안선사가 20년 동안 알았던 그 경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나라면 이렇게 번역했으리라.
“원숭이를 새끼를 안고 푸른 봉우리 뒤로 돌아가고
새는 꽃을 물고 푸른 절벽 앞에 떨어진다.”

무엇이 ‘푸른 절벽 앞으로 떨어지는 소식’인가?
이것을 안다면 틀림없이 ‘코끼리가 천둥소리에 놀라니 꽃이 상아로 들어간다(象被雷驚花入牙)’한 뜻도 분명할 것이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암두스님은 무엇을 근거로 말후구(末後句)라는 썼을까? 왜냐하면 누구도 이전에는 이런 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유명한 것이다.
여래심인가? 조사심인가? 본래심인가? 열반묘심인가?
만약 살필 수 있다면 나의 이런 말에 박장대소를 하리라.
애초에 성철스님의 덕산탁발화에 대한 코멘트에는 대략 상으로는 허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핀다면 크게 엉성했다고 하겠다.
“대중들이여, 이들 공안을 총림에서는 흔히들 논란하지마는 산승의 견처로 점검해 보니, 덕산의 삼부자(三父子)가 말후구는 꿈에도 몰랐고 설두의 사족은 지옥에 떨어지기 화살과 같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말후구인가?”
양구하고 나서 말하였다.
“물소가 달을 구경하니 문채가 뿔에서 나고
코끼리가 뇌성에 놀라니 꽃이 이빨 사이에 들어간다.” (성철스님 번역)

참으로 인용을 잘했으면서도 흡족한 번역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문(無門) 혜개(慧開)선사의 <무문관(無門關)>에서는 말하였다.  
만약 말후구라면 암두 덕산이 모두 꿈에도 아직 보지 못했다. 점검해보면 흡사 선반 위의 꼭두각시(인형)과 같다.
若是末後句。巖頭德山俱未夢見在。撿點將來好。似一棚傀儡。

최초의 구절을 알면 곧장 말후구를 알지만.
말후(구)와 최초(의 구절)은 저 하나의 구절이 아니다.
識得最初句 便會末後句 末後與最初 不是者一句

무엇을 최초의 구절이라고 하고 무엇을 말후구라고 하는가?
이것은 곧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대오를 하고서 ‘기이하다. 일체중생이 여래의 지혜덕상을 갖추고 있었구나.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알지 못할 뿐이다.’라고 한 것이 곧 최초의 구절이다.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해탈법문(微妙解脫法門)이 있는데, 그대에게 부촉하노라. 그대는 마땅히 보호해 간직하고 유통(流通)하여서 끊어지지 않게 하라.’ 이것이 곧 말후구인 것이다.

덕산은 이미 용담화상을 만나서 대오를 하였고 설봉은 오산진에서 대오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말후구를 모른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까? 이것을 치밀하게 살피고서 꿰뚫을 수 있어야 비로소 전체를 드러낼 수 있으리라.
당시에 저 설봉과 덕산은 무공철추(無空鐵錘)였다. 한 사람은 높고 높은 곳에서 내려갈 줄을 몰랐고 한 사람은 낮고 낮은 곳에 나아가서 올라갈 줄을 몰랐다.
무문 혜개 선사가 최초 구절과 마지막 구절로 들추었어도 그저 절반을 보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저 호국 징 선사가 본래심을 말했는데, 전체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송하겠다.

최초의 구절, 최후의 구절이여
참으로 바닷물을 다 마시고
산호가지가 드러나서는
화살이 신라로 날아가리라.

취산(翠山) 쓰다.

?
  • ?
    선하지않는 선 2016.01.02 20:25
    새는 푸른 바위 앞에서 떨어진 꽃잎을 물고 오네.<=>.새는 꽃을 물고 푸른 절벽 앞에 떨어진다'
    ==============================================================
    두 문장은 천지 차이 지요? 새가 바위앞에 떨어진 꽃잎을 물고 라는 글귀와 꽃을 문 새가 절벽 앞에 떨어진다는 뜻은
    천지현격! 왜 그럴까? ()()()
  • profile
    취산 2016.01.04 13:05
    일찍이 등불이 불인 줄 알았다면
    어찌 사람에게 불씨를 빌려 밥을 지으리오.
    쇠말뚝을 뽑아내서는
    등롱을 노주(露柱)에 건다.
  • ?
    chobo 2018.02.11 06:39 SECRET

    "비밀글입니다."


취모검

글: 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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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철스님의 말후구를 살피다 3 2015.04.20 운영자 2018.02.11
5 백장의 들오리2 2015.04.20 운영자 201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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