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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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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소암(老婆燒庵)에 대한 점검

 

- 노파가 암자를 불사르다 -

 

예전에 어느 노파가 한 암주를 공양하면서 이십년을 보냈다.

언제나 열여섯의 여인으로 하여금 밥을 보내고 시중들게 하였는데, 하루는 여인으로 하여금 끌어안고서 묻게 하였다.

“바로 이러할 때는 어떻습니까?”

암주가 말했다.

“고목이 찬 바위에 기대었으니 삼월(三春)에 온기가 없다.”

여인이 돌아가서 노파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노파가 말했다.

“내가 이십년 동안 저 속한(俗漢)에게 공양을 올렸구나.”

마침내 쫓아내고서 암자에 불을 질렀다.

昔有一婆。供養一菴主。經二十餘年。嘗令一二八女子送飯給侍。一日令女子抱定云。正當與麼時如何。庵主曰。枯木倚寒巖。三春無暖氣。女歸舉似婆。婆曰。我二十年只供養得箇俗漢。遂趁出放火燒卻菴。

 

취산:

노파와 암주여

높아서는 내려서기 어렵고

깊어서는 올라가기 어렵다.

고목에서 꽃을 찾고 흑산으로 향해서는
서로 만나기 어려운데

참으로 몸을 돌릴 곳을 알아서는

한량없는 양단의 전쟁이 벌써 그쳤으리라.

 

노파소암 화두를 무수한 선객들이 거론하지만 제대로 드러내는 것을 구경하기란 참으로 요원할 뿐이다. 안목을 갖춘다면 어찌 제대로 꿰뚫지 못하리오.

이 화두는 중국 청나라 철오(徹悟)선사의 일화인데 한국에서는 특별히 널리 거론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거량하는 무수한 말들이 있지만 인터넷에 올려진 몇 가지 사례만을 들어서 살펴보자.

 

1. 어떤 자는 말한다.

“마른나무(枯木)가 찬 바위에 기대니, 한겨울에도 따스한 기운이 없도다.”

물론 마른나무는 그 딸을 가리키고 찬 바위는 자신을 가리킨다. 이러던 경지를 일러서 선가에서는 전통적으로 고목선(枯木禪)이란 부정적 표현을 쓴다. 정(情: 마음)이 끊어지면 공부 역시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딸은 액면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했다. 노파는 공부경지를 고목선으로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이에 그만 화가 나서“내가 이십년동안 속인을 시봉했구나” 통탄하면서 일어나 암자로 달려가서 그 납자를 쫓아내고 토굴 역시 불질러 버렸다.

어설픈 공부경계 조금 나타났다고 해서 20년 묵은 납자를 들었다 놓았다 해봐야 그것 역시 하찮은 중생경계에 불과하다. 물론 고지식하게 원론만을 죽어라 고수한 그 납자에게 큰 허물은 있다. 젊은 딸에게는 그 답변이 맞다. 하지만 딸에게 한 법문을 그 어머니는 자기에게 한 법문으로 이해했던 것이 잘못이다.

만약 그 어머니가 와서 안겼더라면 천동함걸(1118~1186) 선사처럼 당연히 그 납자도 이렇게 답변했을 것이다.

“한 줌의 버들가지를 거둘 수 없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달아두노라.”

 

취산: 여기에서 ‘정(情: 마음)이 끊어지면 공부 역시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렇게 알아서는 성문(聲聞)의 경계를 살펴서 암주를 저울질하는 것일 뿐이다. 저 노파를 표현하기를 ‘어설픈 공부경계’라고 했는데, 자세히 살필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러나 흔히 ‘노파가 암주보다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그래도 다행스럽다.

저 노파는 어떤 안목이 있었기에 ‘20년 동안 속한(俗漢)을 시봉했다’고 했을까? 노파의 이러한 견해 자체가 곧 노파의 살림살이를 그대로 들추어 보여주는 일이다. 만약 이 화두를 자세히 꿰뚫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덕산탁발화’를 엿볼 수 있으리라.

또한 ‘젊은 딸에게는 그 답변이 맞다.’라고 했는데, 번뇌를 녹여가야 하는 성문의 입장에서라면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알아서는 저 딸을 크게 잘못 살피고 있는 것이다. 쇠 쓰레받기를 숯다리미로 아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무엇을 쇠 쓰레받기라고 하겠는가? 모두가 여래선을 거론하고 말하지만 참으로 무엇을 여래선이라고 하겠는가? 흔히 작년의 가난, 금년의 가난을 말하면 그저 가난하고 가난한 것으로 무엇을 가난이라고 하는가?

열반회상에서 순타는 세존에게 스스로를 ‘몹시 가난한 자’라고 표현하였다. 어째서 가난한 자인가? 세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딸이 안기든 노파가 안기든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저 노파와 딸이 함께 그런 계책을 꾸몄느냐는 것이다.

저 암주의 처지에서는 누가 묻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백 사람이 왔어도 그저 대동소이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대답하는 자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스스로의 견해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천동스님의 구절 즉 ‘한 줌의 버들가지를 거둘 수 없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달아두노라.’를 인용하였는데, 잘 살펴야 한다.

어째서인가?

이 ‘노파소암’에 대해서 일찍이 송나라 천동 함걸선사는 이렇게 코멘트를 하였다.

“이 노파의 안방(洞房: 幽深的内室)이 심원하여 물샐 틈이 없는데, 문득 마른 나무에서 꽃을 내고 차가운 바위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저 스님은 외로운 몸이 멀고 멀며 큰 파도를 뚫고 들어가며 한가하게 앉아서 하늘까지 솟아오르는 조수의 물결을 끊어서 물방울도 몸에 적시지 않았다. 자세히 점검해보면, (목에 쓴) 칼을 부수고 쇠사슬을 끊는 것은 두 사람에게 없지 않지만 불법(佛法)이라면 (두 사람이) 꿈에도 보지 못했다. (나) 오거(烏巨)가 이렇게 거론했는데, 결국에는 뜻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양구하고서는 말했다.

“한 아름의 버들가지를 거두지 않고 안개와 함께 옥(玉) 난간에 걸쳐두었다.”

天童傑云。者婆子洞房深穩水洩不通。偏向枯木上糝花。寒巖中發燄。個僧孤身迥迥慣入洪波。

等閑坐斷潑天潮。到底身無涓滴水。仔細檢點將來。敲枷打鎖不無二人。若是佛法。未夢見在。

烏巨與麼提持。畢竟意歸何處。良久云。一把綠絲收不得。和煙搭在玉欄干。

 

※참고로 다른 글에서는 ‘和風搭在玉欄干(바람에 옥난간에 걸쳤다)’(續古尊宿語要)라고도 하였다.

 

취산: 저 천동 함걸선사께서는 암주와 노파를 매우 자세하면서도 친절하게 점검해보였다.

만약 ‘마른 나무에서 꽃을 내고 차가운 바위에서 불꽃을 일으켰다’라는 구절을 살필 수 있다면 틀림없이 저 노파와 딸을 꿰뚫을 수 있으리라. 만약 이것을 살피지 못하고서 노파와 암주를 거론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결국 성문의 경계 속에서 성문의 경계를 내지르고 신랄하게 비평하는 것에 불과하다.

천동선사의 ‘한 아름의 버들가지를 거두지 않고 안개와 함께 옥(玉) 난간에 걸쳐두었다.’라는 구절 가운데는 두 개의 관문이 있고 그것을 꿰뚫은 천동선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저 노파와 암주의 경계 밖의 소식이다. 그렇지만 잘 살펴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서 치밀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조사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저 노파와 암주는 서로 다른 경계에 머물고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전혀 보지 못하였다. 둘 다 반쪽을 들고서 스스로를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노파와 암주를 모두 아울러는 구절을 토해내는 안목을 보여주지 못해서는 누구라도 결국 저 둘 가운데에 떨어질 뿐이다.

천동스님의 이 구절은 바로 이와 같은 일전어(一轉語)인 것이다.

 

一把綠絲收不得。和煙搭在玉欄干。

한 움큼의 버들가지를 거두지 않고 안개와 함께 옥난간에 걸쳐둔다.

 

 

3. 어떤 자는 말한다.

“일등 수좌는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데, 사사무애(事事無碍)이기 때문이다. 이등 수좌는 수류거(隨流去) 상황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른데, 이미 나와 너라는 분별심을 내어 고집해야 할 주객(主客) 능소(能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삼등 수좌는 아무 감각이 없다고 맨송맨송한 표정을 짓는데, 공(空)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를 든 수좌와 같이, 삼동 고목 나무에 차디찬 바위 어쩌고저쩌고 하는 부류이다. 열등 수좌는 딸아이에게 탐착하고 마는데, 업력에 끄달려서 색욕에 흔들렸기 때문이다.”

 

취산: 탁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교학으로 수행자 패턴을 정의하고 선을 담으려고 해도 어설픈 짓일 뿐이다. 저 노파가 암자를 불태운 것은 일등 수좌의 일인가? 열등 수좌의 일인가? 색욕 운운하고 공의 집착이라고 해서야 어찌 저 스님과 노파를 볼 수 있을까? 저 딸에 대해서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 노파와 암주가 스스로 굳게 지키는 것이 비록 반쪽이기는 하지만 홀연히 눈을 활짝 열어서는 원래 서로가 서로를 배척할 일이 아닌 것이다.

 

4. 숭산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중략-

이 어여쁜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초암에 당도하자 암자의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서 선승이 홀연히 앉아서 면벽좌선(面壁坐禪)하고 있는 뒤로 가서 갑자기 꼭 껴안고 아양을 떨면서 속삭이듯 말하였다.

“스님! 이때의 경계가 어떻습니까?”

그러나 선승은 안색은 고사하고 앉음새도 변함없이 소상(塑像)처럼 묵묵히 있더니 담담하게 말하였다.

“고목(枯木)이 한암(寒岩)을 의지하니 삼동(三冬)에 난기(暖氣)가 없도다!”

바싹 마른 나무가 찬바람에 닦일 대로 닦인 바위에 닿으니 무슨 따뜻한 기운이 있으리오. 즉 마른 나무 같은 그대가 찬바위 같은 나를 껴안았거늘 무슨 따스한 정이 움직이겠느냐는 무념무상(無念無想) 그대로를 말한 것이다.

꽃송이처럼 아름다운 처녀가 곱게 단장을 하고 교태를 지으며 껴안았을 때의 그 경계는 사람에 따라 공부에 따라 모두 다를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소녀는 곧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 어머니한테 선승은 정말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아무심(無我無心)의 삼매에 들어 있는 것 같다고 자세히 보고하였다. 노파는 딸의 말을 듣자 갑자기 노기가 충천하여 벌떡 일어나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그런 속물(俗物)을 12년 동안이나 공양하다니!” 분노에 떨면서 초암으로 곧장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초암에 당도하자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 선승에게 욕설을 퍼붓고 당장 그를 내쫓아버리고는 초암을 불살랐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 공안에 누가 허물이 있는 것일까? 노파는 왜 선승이 무념무상 무아무심의 지경에 이르도록 공부를 하였건만 속물을 12년간이나 공양하였다고 낙망분노하여 내쫓아버리고 초암을 불살랐는가 한번 점검(點檢)하여 볼 일이다. 자! 어떻게 답을 하여야만 그 선승같이 쫓겨나지 않을 것인가?

 

취산: 만약 저 노파의 뜻에 부합했다면 그것은 곧 굴욕이며 수치일 뿐이다. 둘 다 쫓아내고서 불을 질러도 시원치 않았으리라. 하물며 어찌 쫓겨나지 않기를 바라리오. 그러나 이것은 저 숭산의 의문이리라. 참으로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아무심(無我無心)이라면 어찌 광채가 절로 일어나지 않았으리오. 다만 죽은 물에는 창룡이 머물지 않고 흙속에 묻힌 황금은 빛을 발하지 못할 뿐이다.

 

5. 성철스님은 이렇게 코멘트하였다.

 

이것이 종문에서 유명한 ‘파자소암’이라는 공안입니다. 늙은 할망구가 암자를 불사르고 암주를 쫓아낸 법문인데, 피상적으로 볼 때는 그 암주가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서 죽는 것만 알았지 참으로 살아나 자재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할망구가 “속인”이라고 꾸짖으면서 쫓아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본다면, 할망구가 그 암자를 불사르고 암주를 쫓아낸 뜻도 영 모르거니와 또 암주가 “마른 나무가 찬 바위를 의지하니 삼동에 따뜻한 기운이 없도다”라고 한 뜻도 절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 참뜻은 저 깊은 데 있습니다. 누구든지 공부를 해서 그 할망구가 암자를 불 지르고 그 암주를 쫓아 낸 뜻을 확실히 알면 일체법과 모든 공안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전체를 다 통달하게 됩니다. 이 공안은 그렇게 아주 깊은 법문이어서 선종에서도 중대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피상적 관찰로는 이 법문의 뜻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이 공안에 대해서 한 마디 평을 하겠습니다.

천길 얼음 위에 붉은 해가 밝고 밝으며

일곱자 지팡이 밑에 푸른 구슬이 구르고 구른다.

이 뜻을 알면 할망구가 중 쫓아낸 것도 알 수 있는 것이고 중이 답한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취산: 성철스님의 견처가 뭇 가운데에서는 뛰어나다는 것이 빈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그 암주가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서 죽는 것만 알았지 참으로 살아나 자재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할망구가 “속인”이라고 꾸짖으면서 쫓아내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저 노파가 ‘속인’이라고 한 뜻이 결국 어디에 있었는가? 성철스님이 ‘공에 빠지고 고요함 운운’을 한 것은 저 성문의 경계를 지적했다고 하겠다. 중생의 번뇌가 다해서는 성문의 경계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해도 육조의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저 암주를 살피는데 단순히 글자를 더듬어서는 백천의 구절과 회통을 얻지 못한다. 반드시 그만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그 할망구가 암자를 불 지르고 그 암주를 쫓아 낸 뜻을 확실히 알면 일체법과 모든 공안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전체를 다 통달하게 됩니다.’라고 했는데, 그러나 어디에서도 성철스님은 그 이유를 코멘트하지 않고 있다.

이 ‘이유’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야 비로소 남의 글자에 속지 않는다고 하리라. 무엇 때문에 저 암주를 노파는 쫓아냈을까? 나 취산이라면 이렇게 말하리라.

“호랑이의 얼룩을 사람의 얼룩으로 가늠했다.”

노파가 암주를 속인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암주가 속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을 속인이라고 하는가? 성문(聲聞)의 네 가지 과위(果位)  이전을 말한다.

노파가 암자에 불을 지른 뜻은 딸을 보낸 뜻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곧 고목에서 꽃을 피우는 재주이다.

저 노파가 이렇듯 소란을 피운 것은 모두 저 암주를 제대로 꿰뚫지 못해서이다. 그저 반자(半字)의 글자를 이루어서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어째서 저 암주는 노파를 흔들지 못했을까?

이것은 마치 저 덕산이 발우를 들고 법당으로 내려가는데, 당시 공양주였던 설봉이 보고서 꾸짖으며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치지 않았는데, 이 늙은이가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는가?’라고 하였는데, 이에 곧 고개를 푹 숙이고 방장실로 돌아간 것과 같다. 어째서 기량과 역량이 출중한 덕산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답을 하지 못했을까?

저 암주를 가볍게 봐서는 전혀 틀리다.

 

성철스님의 본지풍광에서는 여러 게송들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고 있다.

(다음은 본지풍광의 일부를 그대로 옮겼다)

 

밀암 걸선사가 염하였다.

“이 노바는 안방이 깊고 멀어서 물샐 틈이 없으나

문득 마른 나무에 꽃을 피게 하고 찬 바위 속에서 불꽃이 일어나게 한다.

이 스님은 외로운 몸이 멀고 멀어서 익히 큰 물결 속에 들어가되,

하늘에 치솟는 조수를 한가히 앉아서 끊고

바닥에 이르러도 한 방울 물도 몸에 묻지 않는다.

자세히 검토해보니 목에 쓴 칼을 두드려 부수고 발을 묶은 쇠사슬을 깨뜨림은

두 사람에게 다 없지 않지마는 불법을 말할진댄 꿈에도 보지 못하였다.

내가 이렇게 평론함은 그 뜻이 어디로 돌아가는가?”

한참 묵묵한 후에 말하였다.

“한 묶음의 버들가지를 거두지 못하니 봄바람이 옥난간 위에 걸쳐 놓는다.”

(번역 성철스님)

 

성철스님의 코멘트:

파자가 사는 곳은 참으로 깊고 깊어서 부처도 들어갈 수 없고 조사도 들어갈 수 없고 물 한 방울, 바람 한 점 들어갈 수 없으나, 바짝 마른 나무에 꽃을 피게 하고 차가운 바위 속에서 불이 나게 하는 그런 기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 그 암주는 큰 바다에 나가 노는 것을 좋아하여 하늘 닿는 물결 속에서도 아무 힘들이지 않고 저 바다 밑바닥에 이르러도 몸에는 물 한 방울 묻지 않는 그런 기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그렇게 훌륭한 법을 가지고 있어 감옥에 들어가도 유유히 나올 수 있는 재주를 가지긴 했지만 불법은 꿈에도 알지 못하는 멍텅구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선 마지막에“한 묶음의 버들가지를 거두지 못하니 봄바람이 옥난간 위에 걸쳐놓는다”고 송을 읊으셨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의 뜻을 알면 노파가 암자를 불사른 뜻도 알 수 있고, 암주가 말한 뜻도 알 수 있고, 또 밀암스님이 이 공안에 대해 평한 뜻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밀암선사의 이 법문에 내 한 마디 붙이겠습니다.

 

취산: 여기에서 ‘참으로 깊고 깊어서 부처도 들어갈 수 없고 조사도 들어갈 수 없고 물 한 방울, 바람 한 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這婆子洞房深遠水泄不通’라는 구절을 코멘트한 것인데, 부처도 들어갈 수 없고 조사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에는 줄줄 새는 바가 있다.

어째서인가?

이것을 자세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번역에서부터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천동 함걸선사는 말했다.

“이 노파의 안방(洞房: 幽深的内室)이 심원하여 물샐 틈이 없었는데, 문득 마른 나무에서 꽃을 내고 차가운 바위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저 스님은 외로운 몸이 멀고멀며 익숙하게 큰 파도를 뚫고 들어가며 한가하게 앉아서 하늘까지 솟아오르는 조수의 물결을 끊어서 물방울에 몸을 적시지 않았다.

자세히 점검해보면, (목에 쓴) 칼을 부수고 쇠사슬을 끊는 것은 두 사람에게 없지 않지만 불법(佛法)이라면 (두 사람이) 꿈에도 보지 못했다. (나) 오거(烏巨)가 이렇게 거론하는 뜻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한참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한 아름의 버들가지를 거두지 않고 바람과 함께 옥(玉) 난간에 걸쳐둔다.” (취산 번역)

這婆子, 洞房深遠, 水泄不通, 便向枯木上. 糝花, 寒嵒中發焰. 箇僧, 孤身逈逈, 慣入洪波, 等閑坐斷潑天潮, 到底身無涓滴水. 子細點撿將來, 敲枷打鏁, 卽不無二人, 若是佛法, 未夢見在. 烏巨伊麽提持. 意歸何處? 良久云, 一把柳條收不得, 和風搭在玉欄干.

 

취산: 안방(洞房: 幽深的内室)의 심원함이여, 객 가운데 주인이다.

마른 나무에서 꽃이 피고 찬 바위에서 불꽃을 일으킴이여, 죽은 나무에서 버섯을 얻는다.

한 방울도 물을 적시지 않음이여, 모든 성인을 흠모하지 않고 자기심령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불법(佛法)이라면 (두 사람이) 꿈에도 보지 못함이여, 각자가 반근을 얻었다.

버들가지를 거두지 않고 바람과 함께 옥(玉) 난간에 걸쳐놓음이여, 나를 보려면 두 겹의 관문을 지나오라.

중봉 본선사가 염하였다.

 

삼동의 마른 나무는 봄볕을 만났고

푸른 꽃받침 찬 꽃송이는 맑은 향기를 토한다.

흰 머리 노바가 인정이 없어

차갑게 꽃나무를 보고 스님을 哭한다.

(번역 성철스님)

 

성철스님의 코멘트: 삼동 아주 추울 때 바싹 마른 나무는 봄볕을 만나 살아나고, 파랗게 잎 피고 꽃잎이 붉게 물들어 참으로 좋은 향기를 뿜어 냅니다. 머리 허연 노파는 인정이 눈꼽만큼도 없어 아주 냉정한 차디찬 눈으로 꽃과 나무를 보고서 가슴을 두드리면서 “아이고 아이고”하고 울더라고 곡했습니다. 이것이 노파와 암주의 그 법문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취산: 아주 냉정한 차디찬 눈으로 꽃과 나무를 보고서 가슴을 두드렸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성철스님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으며 노파를 어떻게 알았을까?

천길 얼음 위에 붉은 해가 밝고 밝으며

일곱자 지팡이 밑에 푸른 구슬이 구르고 구른다.

 

중본선사의 게송에 대해서도 다시 번역해보겠다.

 

삼동의 고목이 봄볕을 만나면

푸른 잎, 차가운 꽃에서 옛 향기(古香)를 토한다.

백발의 노파가 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어서

차갑게 꽃나무를 보며 사내(檀郎)를 곡한다.

三冬枯木遇春陽,翠萼寒英噴古香。

雪鬢老婆情未瞥,冷看花樹哭檀郎。

 

취산: 싸늘하게 꽃나무를 봄이여, 화로의 재속에서 불씨를 뒤적거렸다.

사내를 곡하였음이여, 저 노파는 암주가 바다 속을 걷는 것을 안타까워했어도 옛 향기를 더듬지는 못했다고 하겠다.

 

허당 우선사가 송(頌)하였다.

 

무쇠 벽을 활짝 여니 구름이 조각조각 떠돌고

검은 산을 차내니 달이 둥글고 둥글다.

그 가운데 명암이 서로 침해하는 곳은

하늘 밖에 머리를 내밀어도 누가 보아 알리오. (번역 성철스님)

 

취산: 성철스님은 저 ‘명암이 서로 침해하는 곳’을 어떻게 알았기에 극칙으로 삼는 것일까? 과연 그러할까? 다시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착어를 붙였다.

 

성철스님의 착어:

은은한 향기는 화로 속에서 나오고

솔솔 부는 맑은 바람은 자리 위에서 일어나네.

 

취산: 은은한 향기, 맑은 바람이여,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에서 차가운 바람이 인다.

 

번역을 다시 해보자.

 

철벽(鐵壁)을 쪼개 열면 구름이 조각조각이고

흑산(黑山)을 잽싸게 빠져 나오면 달이 둥글고 둥글다.

중간의 밝음과 어둠이 서로를 능멸하는 곳에서

하늘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서는 누가 알아보리오. (허당 우)

虛堂和尚 - 鐵壁迸開雲片片。黑山輥出月團團。就中明暗相凌處。天外出頭誰解看。

(취산 번역)

 

취산: 철벽(鐵壁)을 쪼갬이여, 금구(金口)에 걸림이 없다.

흑산(黑山)을 잽싸게 빠져나옴이여, 노주(露柱)가 이 일을 안다.

중간의 밝음과 어둠이 서로를 능멸함이여, 노파가 암주를 긍정치 않고 암주가 노파를 긍정하지 않는다.

하늘 밖으로 고개를 내밀음이여, 전과신라(箭過新羅)이다.

 

참고로 응암 화는 노래하였다.

 

금색두타가 홀연히 파안함이여

보았어도 그저 대롱으로 얼룩을 보았다.

당시에 만약 일찌감치 고개를 돌렸더라면

자손이 흑산에 떨어짐을 보는 것을 면했으리라.

金色頭陀忽破顏。看來也是管窺斑。

當時若得回頭早。免見兒孫墮黑山。(應菴華)。(취산번역)

 

취산: 흑산에 떨어짐이여, 노파를 알기는 쉬워도 암주를 알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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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산 2018.05.29 19:04

    "이 화두는 중국 청나라 철오(徹悟)선사의 일화인데 한국에서는 특별히 널리 거론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부분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화두는 선문염송의 마지막 부분이고, 선문염송은 고려 때 편찬되었는데, 청나라가 건국하기 훨씬 전이지요...


취모검

글: 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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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최근 수정일
24 어째서 禪의 구절을 저마다 다르게 번역하는가? 2017.05.31 취산 2017.06.21
23 법신을 꿰뚫은 구절에 대한 댸혜종고와 성철스님의 견해 차이 2016.07.21 취산 2017.06.21
22 화두는 하나의 덩어리이다 2015.08.27 취산 2015.08.28
21 산은 산 물은 물 2015.08.15 취산 2015.08.15
20 임제의 무위진인(無位眞人) 2015.07.26 취산 2015.07.26
19 성철스님의 염화미소 2015.07.22 취산 2015.07.26
18 진제스님의 염치없는 중 3 2015.07.18 취산 2017.09.05
17 협산의 경계 2015.07.12 취산 2015.07.14
16 물을 뜨니 달이 손에 있다 2015.06.21 취산 2015.06.29
15 향엄상수화 2 2015.05.29 취산 2015.06.04
14 조주의 차를 마시라 4 2015.05.28 취산 2016.02.15
13 용수불개전체현(龍袖拂開全體 2015.05.14 취산 2015.05.14
12 태고보우에게 법을 전하다 2015.05.10 취산 2015.05.10
11 노파소암에 대한 점검2 2015.04.20 운영자 2015.05.03
» 노파소암(老婆燒庵)에 대한 점검1 1 2015.04.20 운영자 2018.08.05
9 방거사, 대매를 만나다 2015.04.20 운영자 2015.04.25
8 즉심즉불 그리고 평상심2 2015.04.20 운영자 2015.04.25
7 즉심즉불 그리고 평상심1 2015.04.20 운영자 2015.04.25
6 성철스님의 말후구를 살피다 3 2015.04.20 운영자 2018.02.11
5 백장의 들오리2 2015.04.20 운영자 201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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