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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2015.06.20 12:37

달마의 무심(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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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의 무심(無心)

 

대저 지극한 이치에는 말이 없지만 말을 빌려야 이치가 드러난다. 대도는 모양이 없지만 거친 것에 닿아서는 형상으로 드러난다.

지금 두 사람을 가정해서 무심론에 대해서 거론하겠다.

 

제자가 화상에게 물었다.

“유심(有心)입니까? 무심(無心)입니까?”

“무심이다.”

“무심이라면 누가 견문각지(見聞覺知)를 알고 누가 무심인 줄을 압니까?”

“이처럼 무심이 이미 견문각지하고 이처럼 무심이 능히 무심을 안다.”

“이미 무심이라면 견문각지가 없어야 맞는데, 어째서 견문각지가 있는 것입니까?”

“나는 비록 무심이지만 능히 보고 능히 듣고 능히 느끼고 능히 안다.”

“이미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면 이미 마음이 있는 것인데, 어째서 없다고 하겠습니까?”

“오직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곧 무심일 따름이다. 어디에서 다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달리 무심이 있으리오.”

夫至理無言。要假言而顯理。大道無相為接粗而見形。今且假立二人共談無心之論矣。弟子問和尚曰。有心無心。答曰。無心。問曰。既云無心。誰能見聞覺知。誰知無心。答曰。還是無心既見聞覺知。還是無心能知無心。問曰。既若無心。即合無有見聞覺知。云何得有見聞覺知。答曰。我雖無心能見能聞能覺能知。問曰。既能見聞覺知。即是有心。那得稱無。答曰。只是見聞覺知。即是無心。何處更離見聞覺知別有無心。

(달마의 ‘무심론’ 가운데에서)

 

대저 지극한 이치에는 말이 없지만 말을 빌려야 이치가 드러난다.

夫至理無言。要假言而顯理。。

 

말이 애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이치가 있고 그것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면 비로소 말이 생기는 것이다.

무엇을 ‘말’이라고 하는가? 말이란 곧 글자이며 기호이며 숫자이다. 이치란 곧 자연의 법칙, 내지는 일정한 패턴, 공식. 의미, 뜻을 함축하고 있다.

과학이 논리와 숫자를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 또한 말을 빌려서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말로 드러내는 것에는 매우 한계가 있다. 물리학자가 사물의 이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오직 네 개의 기본단위에서 출발한다. 즉 시간, 공간, 질량, 온도가 그것이다. 이것들이 서로 상관관계를 형성하고 마침내 법칙, 내지는 공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을 공식으로 표현하면 F(중력)=g(M1*M2)/(R*R)이다. 여기에는 두 물체의 질량(M)과 서로 떨어진 거리(R)를 포함하고 있고 또한 g라는 중력상수 속에 시간과 공간, 질량, 온도의 응축이 있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에너지를 질량과 빛의 속도로 표현하고 있다. 즉 E=M*C*C이다. 이는 곧 자연의 법칙을 이처럼 간단한 단위로 묶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지독한 폭력이다. 시인, 음악가에게는 이러한 법칙이 오히려 갇힌 우주를 영감하며 슬퍼할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로는 전체를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의 말을 따라서 일생을 허비한다면 그 얼마나 허무하고 원통한 일이겠는가?

말이란 그저 샘플과도 같고 청사진과도 같다고 하겠다.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영감하게 하고 첫발을 내딛도록 돕고 길을 안내하는 지도와도 같은 것이다.

 

대도는 모양이 없지만 거친 것에 닿아서는 형상으로 드러난다.

大道無相為接粗而見形

 

여기에서 대도(大道)는 곧 달마의 뜻이며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일컫는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불경이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이미 경전 속에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야 했을까?

예로부터 끊임없이 이것에 대해서 묻고 또 물었다.

 

임제스님이 아직 깨닫기 전에 황벽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적적의(的的意: 핵심 가운데 핵심)입니까?”

황벽이 곧 (방망이로 스무 차례를) 후려쳤다. 이렇게 세 차례 물었고 세 차례를 후려쳤다.

 

수산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바람으로 불고 햇볕으로 굽는다.”

首山因僧問。如何是祖師西來意。師曰。風吹日炙。 

 

한 스님이 석상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마치 어떤 사람이 천 길의 우물속에 있으면서 한 치의 끈도 빌리지 않고 나오는 것과 같다면 이 사람이 곧 서래의를 대답줄 수 있으리라."

有僧問石霜。如何是祖師西來意。石霜云。如人在千尺井中。不假寸繩出得。此人即答汝西來意。

 

호주 광법선원 원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서래의입니까?”

“벽돌과 기와조각이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불 속에서 내민 머리이다.”

“무슨 뜻입니까?”

“머리도 붉고 얼굴도 붉다.”

湖州廣法禪院源禪師

問。如何是祖師西來意。師云。磚頭瓦片。

問。如何是佛。師云。火裏出頭。僧曰。意旨如何。師云。頭紅面赤。

 

조주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이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이다.”

趙州因僧問。如何是祖師西來意。師曰。庭前柏樹子。曰和莫將境示人。師曰。我不將境示人。曰如何是祖師西來意。師曰。庭前柏樹子。

 

조주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서래의입니까?”

“동쪽 벽에 호로병을 걸어둔 지가 얼마인가?”

“학인은 남방으로 가서 불법을 배울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남방으로 가거든 부처가 있는 곳은 급히 지나가고 부처가 없는 곳에는 머물지 마라.”

“그렇다면 학인이 의지할 곳이 없겠습니다.”

“버들개지, 버들개지”

問。如何是祖師西來意。師曰。東壁上葫蘆。多少時也 

問。學人擬向南方。學些佛法去如何。

師曰。去南方。見有佛處急走過。無佛處不得住。

曰與學人無依也。師曰。柳絮柳絮

第二十三則趙州有無

 

이 모든 질문은 곧 달마가 말하는 저 대도를 밝히려는 것이다. 처음의 말만 들어서는 곧 모든 것을 알 듯해도 이처럼 자세히 살펴서는 실로 저 평이하게 시작했던 말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짐작할 것이다.

 

지금 두 사람을 가정해서 무심론에 대해서 거론하겠다.

今且假立二人共談無心之論矣。

 

이것은 곧 두 사람을 가정해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글을 지었다는 것이다.

 

제자가 화상에게 물었다.

“유심입니까? 무심입니까?”

弟子問和尚曰。有心無心。

 

이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은 고대의 인도에서부터 끊임없이 논쟁되어 온 화두이다.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 사계절이 바뀌고 생로병사, 희노애락이 왔다가 사라진다.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슬픔이 되고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무궁한 작용에는 반드시 이것을 주재하는 주인공이 있을 것이라고 신념하는 자들이 있다. 한편 여기에는 전혀 주재하는 자가 없으며 제 스스로 기계적인 논리와 수학으로 진화해간다는 입장이 있는 것이다.

모든 작용에는 반드시 그것을 주재하는 자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곧 유심(有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장자(莊子)는 말하였다.

“만물이 이처럼 위대하게 작용을 하니, 여기에는 마치 주재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비록 주재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나는 이것을 끝내 밝게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법정에서는 반드시 저 행위자를 밝히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그것을 행한 행위자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법적인 주체, 내지는 개인, 인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행위자가 없었어도 법률과 규칙이 세워지면 동시에 행위자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이것은 곧 유신론, 무신론과도 상통한다. 신의 존재를 주장하므로 선악이 생겨나고 죄인과 착한 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누가 짓고 주재하는가? 고대시대에는 모든 자연현상을 신이 만들고 관리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곧 한 개인에 이르러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조차도 신이 주재하고 관리한다는 개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내면의 무한광대하고 광활한 허공을 체험하는 자들은 전혀 다르게 이해한다. 그들은 저 작용의 주체를 찾고 구해도 결코 마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말하고 주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노자는 말한다.

“만물의 작용은 마치 계곡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여성의 자궁을 만물이 생성되는 원리에 비추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마음이 있는가? 마음이 없는가?

이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인류가 지금까지도 논쟁하고 있는 모든 함축을 담고 있는 것이다.

저 사계절의 작용은 곧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고 하는 작용과 다르지 않다. 사계절은 태양과 지구의 공전에 의해서 생긴다. 그렇다면 견문각지는 무엇에 의해서 생기는가? 그것은 곧 관찰자와 관찰되어지는 대상 사이에는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하겠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으로 표현한다. 눈, 코, 귀, 혀, 몸, 마음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대상을 만나서 여섯 가지 작용을 내는 것이다.

이처럼 보아서는 마치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작용의 배후가 역시 금방이라도 밝혀질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달마는 말했다.

“무심이다.”

答曰。無心。

 

마음이 없다.

생로병사, 희노애락, 견문각지를 주재하는 자는 결국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말한다.

“내가 그것을 했다.”

“내 것이다.”

 

마음이 없다고 해서는 곧 모든 인류가 근거로 삼는 소유권, 내지는 법적인 책임주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누구에게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인가?

인간은 물질 이상의 그 무엇으로 물리적인 법칙에서부터 형상 이전의 도리까지 머금고 있는 존재이다.

인도의 성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스스로에게 항상 나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해보라고 하였다.

“기쁠 때, 누가 기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다시 물어보라. 그 나는 누구인가? 그러면 백 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대답이 사라지고 문득 침묵이 자리할 것이다.”

 

물었다.

“이미 무심이라면 누가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압니까? 누가 무심인줄을 압니까?”

問曰。既云無心。誰能見聞覺知。誰知無心。

 

이미 무심이라면 거기에는 더 이상 주재하는 자가 없는 텅 빈 허공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허공은 곧 존재의 부재이다. 즉 공간을 차지하는 것의 반대의 의미일 뿐이다.

발심(發心)을 하고서 아직 여래의 적멸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찌 참 주재자를 밝힐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옛 선사가 말하기를 ‘마치 하루아침에 관직을 잃고 집이 불타고 부모와 처자식이 다 죽고 친구도 잃고서 길거리에 홀로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자라면 어찌 저 여래의 적멸이 먼 일이겠는가?

저 적멸에 이르지 않았다면 누구인들 저 제자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겠는가?

“이미 마음이 없는데, 누가 있어서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겠습니까?”

여기에서 마음이란 곧 발심(發心)의 심(心)과 같은 의미이다.

무엇이 발심의 심인가? 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이다. 발심이란 곧 멀리서 히말라야의 만년설산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달마조사가 무심(無心)이라고 하는 것은 곧 저 마음 자체도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

어째서 그러하는가? 여기에 근거가 있는가?

원래 끊는 주발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는 것이다.

 

“무심이기에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무심이기에 능히 무심을 안다.”

答曰。還是無心既見聞覺知。還是無心能知無心。

 

이 일은 오직 같은 길을 가는 자가 아는 것처럼 오직 무심이 무심을 알아본다. 바로 여기에서 저 달마조사의 진면목이 슬쩍 드러난다. 나의 무심은 그대가 아는 무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무심이라고 하지만 어찌 다 같은 무심이리오. 산전수전 다 겪은 자가 말하는 무심은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딛는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내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그대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견습공과 달인의 차이와도 같다고 하겠다. 어찌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이미 무심이라면 견문각지가 없어야 맞는데, 어째서 견문각지가 있는 것입니까?”

問曰。既若無心。即合無有見聞覺知。云何得有見聞覺知。

 

제자는 결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마치 오른쪽 뺨을 맞는 것도 억울한데, 어째서 다시 왼쪽 뺨을 내밀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백번이고 천번이고 뺨을 내밀어서 얻어맞는 자가 도리어 공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약사여래불이 전생에 보살행을 행할 때에 스스로를 사루어서 모든 부처에게 공양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석가세존이 전생에 보살행을 닦을 때에 제석천왕이 야차(夜叉)로 변하여 반 구절을 말하니, 감탄하며 매우 희유하다고 여기고서 나머지 반 구절을 말해줄 것을 청하니, 야차는 절벽에 몸을 던지면 말해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이에 곧장 몸을 던졌다.

 

“나는 비록 무심이지만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

答曰。我雖無心能見能聞能覺能知。

 

옛 사람은 말하기를 ‘창룡은 죽은 물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무엇을 죽은 물이라고 하는가? 죽은 물 즉 ‘사수(死水)’의 사전적인 의미는 곧 머물러서 흐르지 않는 물을 일컫는다.

석가세존은 열반의 성품은 곧 ‘상(常)·락(樂)·아(我)·정(淨)’이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는 곧 열반의 깨달음을 얻고서 항상 간직하는 여래의 성품인 것이다. 만약 저 제자의 말대로라면 무아(無我)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석가는 오히려 ‘아(我)’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따라서 여기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석가세존이 49년 동안 삼승(三乘)에게 설법한 가르침의 뜻은 달마의 뜻과 같은가? 다른가?

만약 가려낼 수 있다면 천칠백 공안이 모두 이 갈등을 때린 것이라는 것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면 이미 마음이 있는 것인데, 어째서 마음이 없다고 하십니까?”

問曰。既能見聞覺知。即是有心。那得稱無。

 

이러한 대화는 마치 절벽을 사이에 두고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쪽에서 ‘아’라고 말하면 저쪽에서는 틀림없이 ‘어’라고 듣는 것이다.

제자는 반문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것을 일으키는 주체가 있는데, 어째서 그 주체가 없다고 말하십니까? 지금 크게 잘못 착각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이에 달마가 말하였다.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알 뿐이다. 이것이 곧 무심이다. 어디에 다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달리 무심이 있겠는가?”答曰。只是見聞覺知。即是無心。何處更離見聞覺知別有無心。

 

조주선사는 말하기를 ‘조의(祖意)를 알면 교의(敎意)를 안다’라고 했다. 이것은 곧 저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알 뿐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어째서인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곧 그대로 교의(敎意)이기 때문이다.

 

달마조사는 말하고 있다.

“어디에 다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달리 무심이 있겠는가?”

 

무심이 유심과는 전혀 상관없는 특별한 어떤 것으로 알아서는 부처와 조사를 매몰하게 된다. 그것은 곧 눈멀고 귀먼 자이며 죽은 시체를 지키는 자이다.

달마조사의 이 한 구절이 백천의 공안을 관통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겠다.

 

유심밖에 무심이 없고

무심밖에 유심이 없고

말이 있고 말이 없음은

마치 등나무가 나무를 기대는 것과 같다.

조사의 무심이여

물을 움켜쥐니 달이 손에 있고

꽃을 가지고 노니 향기가 옷에 가득하다.

 

취산 쓰다. 2015.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