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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2015.07.22 10:55

성철스님의 염화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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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염화미소

 

서천의 초조(初祖) 대 가섭존자께서는 세존(世尊)께서 영산(靈山)의 회상(會上)에서 일지화(一枝華: 한 줄기 꽃)를 들어서 큰 무리의 대중과 백만 성현들에게 두루 보이신 것을 보았는데, 오직 가섭만이 파안미소(破顏微笑)하였다.

세존께서 이에 말하였다.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의 미묘해탈법문(微妙解脫法門)이 있는데, (이것을) 그대에게 부촉한다. 그대는 마땅히 보호하고 간직하여 (널리) 유통하고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西天初祖摩訶迦葉尊者。見世尊在靈山會上。拈起一枝華。以青蓮目普示大眾。百萬聖賢。

惟迦葉破顏微笑。世尊乃曰。吾有正法眼藏涅槃妙心實相無相微妙解脫法門。付囑於汝。

汝當護持流通。無令斷絕。 

 

석가세존께서는 세 곳에서 가섭에게 마음을 전하였다.

첫째는 영산회상의 염화미소(拈華微笑)이다.

둘째는 다자탑전반분좌(多子塔前半分座)이다. 즉 다자탑 앞에서 세존이 가섭의 어깨에 가사를 둘려주고 자리를 나누어서 앉았다.

셋째는 곽시쌍부(槨示雙趺)이다. 세존이 열반한 후에 뒤늦게 도착한 가섭이 통곡을 하니, 관 밖으로 두 발이 나왔다.

 

불경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영산회상의 염화미소(拈華微笑)로 돌아간다고 하겠다.

이 염화미소의 화두를 살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석가세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금성(金星)을 보고서 대오(大悟)한 것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당시 영산회상에 인간천상의 백만 성중(聖衆)이 모였는데, 세존이 연꽃을 들고서 한 참을 말이 없자, 모두가 의아해하였다. 그때 오직 가섭만이 홀로 얼굴에 미소가 일었다.

세존께서는 백만 성중 가운데에서 곧 그것을 알아차리고서 법을 전하였다.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의 미묘해탈법문(微妙解脫法門)이 있는데, (이것을) 그대에게 부촉한다. 그대는 마땅히 보호하고 간직하고 (널리) 유통하고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법을 전한다는 것은 나의 깨달음과 그대의 깨달음은 다르지 않다는 선언이며 공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 가섭존자가 미소한 것은 꽃을 든 것을 긍정한 것인가? 부정한 것인가? 아니면 긍정이며 동시에 부정인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가?

이 일을 살피려면 먼저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닫기 바로 이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당시 석가는 몹시 초췌하였다. 겨우 걸어서 강가에 이르러 목을 축이려고 막 허리를 구부리는 순간, 그만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한 참을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을 치다가 간신히 나무 뿌리를 잡고서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개탄하며 스스로 자문하였다.

“이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무슨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한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저 연꽃을 부수고서 꽃 속의 꽃을 드러내는 열쇠인 것이다.

 

석가의 깨달음을 언설로 말한다면 어찌 경전의 구절 밖의 일이겠는가? 세존께서는 평생에 걸쳐서 성문, 연각, 보살의 근기에 따라서 무수한 방편설을 했지만 결국에 ‘나는 일찍이 문밖에 나간 적이 없고 한 법도 설한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깨달음에 저 가섭존자가 계합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조사의 뜻, 즉 조의(祖意)이다. 석가세존이 삼승(三乘)에게 설한 것을 교의(敎意)라고 한다.

예로부터 저 조의(祖意)와 교의(敎意)가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왔다. 어떤 자들은 같다고 하고 어떤 자들은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은 객관식의 문제가 아니다. 정작 이 일을 치밀하게 거론해야 하는 시점은 ‘석가의 큰 깨달음’에서 비롯한다고 하겠다. 그 이전에는 그저 마음속에 깊이 기억해두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지금부터이다.

저 조의(祖意)와 교의(敎意)가 같다는 견해를 짓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는 전혀 다른 이해와 안목을 보인다. 그것은 번역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성철스님은 <본지풍광>에서 ‘염화미소’에 대한 불인(佛印) 원(元)선사의 게송을 들었다.

 

世尊拈花迦葉微笑 水底魚兮天上鳥

誤將彌勒作觀音 熨斗煎茶不同銚

부처님은 꽃을 들고 가섭은 미소지으니

물밑의 고기요 하늘 위의 새로다.

미륵을 잘못 알아 관음보살이라 하고

다리미로 차를 달이니 그릇이 다르구나. (번역: 성철스님)

 

나 취산이라면 이렇게 번역하리라.

 

세존께서 꽃을 들고 가섭이 미소함이여!

물 아래의 물고기이고 하늘 위의 새이다.

오해하여 미륵을 가지고 관음을 짓는데

울두(熨斗)와 전다(煎茶)는 같은 그릇(銚)이 아니다. (번역: 취산)

 

여기에서 ‘水底魚兮天上鳥’ 즉 ‘물 밑에는 물고기요 하늘 위에는 새이다.’라는 구절 속에 교의(敎意)와 조의(祖意)를 다 담았다.

그런데 왜 세존과 가섭을 거론하다가 갑자기 미륵과 관음이 등장하는 것인가?

이것을 살피기란 매우 어렵다.

미륵(彌勒)의 한자풀이는 자시(慈氏)이다. 이것은 곧 세존을 석가(釋迦)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저 관음보살과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세존이 꽃을 드는 것은 저 관음보살의 대 환희심과 같고 가섭이 미소한 것은 저 미륵이 도솔천 내궁(內宮)에 머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허다한 선객들이 잘못 살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 살핀다는 것인가?

여래선과 조사선을 때로는 같다고 하고 때로는 다르다고 말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갈등이다. 이것은 오직 향상(向上)의 종승사(宗乘事)에 깊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끝까지 갈등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여기에는 성철스님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나 또한 오래도록 성철스님의 안목에 대해서 궁금했다.

성철스님은 줄곧 오매일여, 확철대오, 장좌불와를 역설하였다. 그리고 만인이 그것을 깊이 신뢰하였다. 나 역시 성철스님의 <본지풍광>을 보며 선(禪)에 대한 뜻을 견고히 했으며 마침내 해인사로 출가를 하였다.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문제는 마지막 구절이다.

 

울두전다부동조(熨斗煎茶不同銚)

 

성철스님은 ‘다리미로 차를 달이니 그릇이 다르구나.’라고 했는데, 참으로 의아스러울 뿐이다.

어째서인가? 이미 앞의 세 구절이 정연하다면 설령 마지막 구절이 생소하다고 할지라도 일맥상통하는 흐름이 저절로 형성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다(煎茶)’를 구지 ‘차를 달이다’로 번역하는 것은 스스로 많은 갈등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오래전에 이 구절을 보면서 애초에 성철스님이 여래선과 조사선이 다르지 않다고 역설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직감하였다.

나라면 이렇게 번역하리라.

‘울두(熨斗)와 전다(煎茶)는 같은 그릇이 아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혹자는 또한 반문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든 저렇게 번역하든 무슨 근거로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스스로의 심증만으로는 결코 주장할 일이 못 된다는 것에 깊이 수긍한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돌아서 기꺼이 물증을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만약 ‘熨斗煎茶(銚)不同’라고 하면 어떨까? 만약 그렇다면 이보다 명확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증거가 있을까? 그러한 정황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곧 무문혜계선사어록(無門慧開禪師語錄),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오등전서(五燈全書), 속전등록(續傳燈錄) 등에서는 이렇게 싣고 있기 때문이다.

 

‘熨斗煎茶銚不同’ 즉 울두(熨斗)와 전다조(煎茶銚)는 같지 않다(不同).

 

그렇다면 이제 저 울두(熨斗)가 무엇이고 전다조(煎茶銚)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리라. 그저 열핏 보면 둘다 둥글넙적한 모양이라고 하겠다.

울두(熨斗)의 사전적인 뜻은 다리미, 인두를 의미한다. 그리고 전다조(煎茶銚)는 차를 다리는 주전자를 의미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붙이겠다.

 

울두(熨斗)여

오리는 추우면 물속으로 들어간다.

전다조(煎茶銚)여

끓은 냄비에서 요란한 소리를 짓는다.

모름지기 스승을 능가해서는 전수(傳受)를 감당하지만

스승과 같아서는 도리어 스승의 덕을 반감하는 것을.

 

취산 쓰다. 2015. 0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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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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