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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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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의 들오리(野鴨子)

백장이 마조를 시중하며 산을 유람하던 차에, 들오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가는가?”
“날아갔습니다.”
마대사가 백장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백장이 고통스러워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야, 아야!”
마조가 말했다.
“날아갔다고 또 말해봐라.”
백장은 여기에서 계오(契悟: 깨달음에 계합하다)하였다.
百丈侍馬祖遊山次。見野鴨飛過。祖曰。是甚麼。師曰。野鴨子。曰甚麼處去也。師曰。飛過去也。祖搊師鼻頭。師負痛失聲曰。阿耶耶。阿耶耶。祖曰又道飛過去也。師於此契悟。 
(또는 ‘丈於言下有省’이라고 하였다.)

이 화두는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어째서 그러하는가? 부처의 가르침을 꿰뚫지 못해서는 조사의 심인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상승의 근기가 아니라면 모름지기 삼승(三乘: 성문연각보살)이 밟아가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의 가르침을 깊이 의지하고 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에서 육조대사에 이르러서는 방대한 불경의 안개 숲에서 곧장 가로질러서 조사의 심인에 이르는 길을 주창하였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곧 당시의 백장스님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저 백장스님은 어디에 서 있었기에 마조선사의 뜻에 부합을 얻지 못하였을까?
이것은 마치 후에 백장선사가 위산스님에게 지적한 것과도 매우 흡사하다.

하루는 위산 영우가 시중하고 서 있는데, 백장이 물었다.
“누구인가?”
“영우(靈祐)입니다.”
백장이 말했다.
“화로에 불이 있는가?”
위산이 (화로 속을) 뒤져보고서는 말했다.
“불이 없습니다.”
백장이 몸소 일어나서 화로 속을 깊이 뒤져서 작은 불씨를 찾아서는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은 불이 아니냐?”
위산이 깨닫고는 절을 하고서 이해한 바를 벌여 놓았다.
백장이 말했다.
“이것은 그저 잠시의 갈림길(岐路)이다. 경에서는 말하기를, ‘불성(佛性)을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시절인연(時節因緣)을 관하라’고 하였다. 시절이 이미 이르러서는 마치 미혹에서 홀연히 깨달은 듯하고 마치 망각했다가 홀연히 기억해내는 듯하다. 바야흐로 자기의 물건을 살펴야지 남이 얻는 것을 쫓지 마라. 때문에 조사께서는 말하기를, ‘깨달아서는 아직 깨닫기 이전과 같고 마음이 없으면 또한 법도 없다.”라고 하였다. 다만 허망함이 없어서는 범부, 성인이 동등한 마음으로 본래의 심법(本來心法)이 원래 스스로 갖추어진다. 그대가 지금 이미 이러하니, 잘 보호하고 간직하라.”
潭州溈山靈祐禪師。(嗣百丈)一日侍立。百丈問誰。師曰靈祐。丈曰。汝撥爐中有火否。師撥曰。無火。丈躬起深撥得少火。舉以示之曰。此不是火。師發悟禮謝陳其所解。丈曰。此乃暫時岐路耳。經曰。欲見佛性。當觀時節因緣。時節既至。如迷忽悟。如忘忽憶。方省己物。不從他得。故祖師云。悟了同未悟。無心亦無法。只是無虛妄。凡聖等心。本來心法元自備足。汝今既爾。善自護持。
 
당시에 위산스님은 어디에 처하였기에 재속에서 불씨를 찾아내지 못하였을까?
옛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절인연을 거론하는데, 어째서인가? 그것은 곧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니어서 일상이 그대로 도량이 되기 때문이다. 저 백장과 위산이 재속에서 불씨를 뒤적거리는 것이 곧 시절인연이고 마대사가 들오리를 가리켜 보이면서 일깨우려고 했던 것이 곧 시절인연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
바로 저 재속의 불씨를 잘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저 위산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화두는 곧 혼신을 다해 위법망구(爲法忘軀)에 나아갈 때 비로소 제대로 살필 자격을 얻는다고 하겠다.
무엇을 위법망구라고 하는가? 참된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일체를 공양하며 무량한 공덕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가여래의 네 가지의 큰 지혜는 바로 이러한 무량한 공덕으로 말미암는다고 하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 내지는 네 가지의 큰 지혜가 어디에서 왔겠는가?
애초부터 이것을 무시한다면 어찌 조사심인에 나아갈 수 있으리오. 그것은 마치 황금을 끌어안고서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는 결코 끝까지 가지 못할 것이다.
흔히 성품이라고 하면 견문각지,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곧 성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러한 성품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유심의 일이며 무심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께서도 ‘성문연각은 유심이고 보살은 무심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무심은 결국 여래선으로 돌아간다. 조사선과는 요원한 일이다.
이것은 마치 유마경에서 서른여섯보살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저 서른여섯보살의 견해는 결국 여래선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선(禪)에서는 그러한 견해를 기특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마대사가 백장스님의 코를 잡아 비틀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법의 구름 가운데 하염없이 주저앉아있는 것을 끄집어낸 것이다.
무엇이 기특한 일인가?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내딛고 은산철벽을 부수어서는 저 월상녀(月上女)가 성(城)에서 나온 도리로 살필 수 있으리라.  
어째서 월상녀(月上女)인가? 달보다 곱고 눈부시다는 것이다. 그만한 통찰과 지혜가 있기에 성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한 스님이 백장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기특한 일입니까?”
“대웅봉(大雄峰)에 홀로 앉는다.”

당시에 백장스님은 여기에 대해서 살피는 바가 있었지만 깊이 꿰뚫지 못해서 나중에 돌아와서 소리내어 울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어느 날 마조선사가 법상에 오르니, 곧 좌복을 거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이것이 바로 기특한 일이다.
그러나 저 대웅봉에 홀로 앉았어도 두 번째 달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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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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