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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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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의 무위진인(無位眞人)

 

임제선사가 상당하여 말하였다.

“적육단(赤肉團: 붉은 살덩어리) 상에 하나의 무위진인(無位真人)이 있어서 항상 모든 사람의 면문으로 출입한다. 아직 증험하지 못한 자는 살펴보고 살펴보라.”

이때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無位真人)입니까?”

임제선사가 선상에서 내려와 붙잡고는 말하였다.

“말해라. 말해라.”

스님이 의논하고 헤아리려고 하자, 임제선사가 탁 밀치고는 말하였다.

“무위진인이 무슨 간시궐(乾屎橛: 마른 똥막대기)인가?”

그리고는 방장실로 돌아갔다.

臨濟上堂。赤肉團上有一無位真人。常在諸人面門出入。未證據者看看。時有僧出問如何是無位真人。濟下禪床搊住曰道道。僧擬議。濟托開曰無位真人是什麼乾屎橛。便歸方丈。

 

무위진인에 대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면 많은 글들이 보인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발췌해보면 대충 이러하다.

 

무위진인이란 '초발심에서 성불에 이르는 수행단계(42위, 52위, 57위)에 떨어지지 않고 성범(聖凡), 미오(迷悟), 상하(上下), 귀천(貴賤) 등을 초탈한 참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개별성을 초월한 무위진인임을 확인할 때, 우주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의 참다운 면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덕께서 무위진인이란 무엇일까?

고덕께서 무위진인에 대해서 일체 차별경계를 벗어난 참 성품이라하고 참 주인공 자성천진불 무애자애 한 해탈 경계라고 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

 

그렇게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는 모습이 분명하고 확실하건마는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 스님이 새삼스럽게 “무위진인 무엇입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자신이 무위진인이면서 달리 무위진인을 찾는 것이다. 종로에 서서 “서울이 어디입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너 무위진인아, 어디 한번 대답해 봐라.” 무위진인은 무위진인만이 알 수 있으니까. 한데 어찌된 일인지 무위진인은 대답이 없다. 똥 막대기 같은 무위진인을 뒤로하고 방장실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임제스님은 대 해탈, 대 자유의 무위진인을 잘 보여주었다.

 

이 무위진인 말고 어디서 대 해탈을 누릴 것인가. 어디서 대 자유를 누릴 것인가. 불교는 이렇게 명료하다. 명명백백(明明白白), 소소영영(昭昭靈靈, 심성이 밝고 영명함) 그 자체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다. 마치 천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 듯하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다.

 

오랜 시간 법문을 들은 덕산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밖은 칠 흙 같이 어두운지라 용담선사께서 불을 밝혀 덕산선사가 불을 밝혀 덕산선사에게 건네주자 이를 받으려는 순간 불을 확 불어서 꺼버리자 순간 덕산스님은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남방에 마음을 곧 부처라고 떠들어대는 마구니를 한 방에 쳐 부수고 말겠다던 주금강 덕산스님은 크게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자리에 오른 덕산스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알았을까?

 

경허: "어떤 것이 목전의 고명한 한 물건인고?"

혜월: "저만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경허: "어떤 것이 혜명인고?"

이에 혜월 스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가,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서 섰습니다.

경허: "옳고, 옳다."

 

임제 선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시기를,

“한 형상 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이 있어서 항상 여러분들의 얼굴 문으로 드나든다. 증거를 잡지 못한 이는 살펴보라.”하니, 어떤 수좌가 나서서 묻기를,

“어떤 것이 형상 없는 참사람입니까?”하였다. 이에 선사가 선상(禪床)에서 내려와 멱살을 잡고 말하되,

“일러라. 일러라!”하니, 그 수좌가 망설이거늘, 임제 선사가 멱살을 놓고 이르시기를,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무엇이냐? 마른 똥막대기[乾屎橛]니라.”

임제 선사는, 수좌가 형상 없는 참사람을 묻는데 멱살을 잡고, 천장(天章) 선사는 문득 때리니 대중은 두 큰 선사를 알겠는가?

 

두 선사의 용처(用處)가 좋은즉 아주 좋음이요, 아름다운즉 아름다우나,

자세히 점검컨댄, 멀고 멀도다.

필경에 여하(如何)오?

 

타녀이귀소한거(奼女而歸霄漢去)

애랑유재수공방(獃郞猶在守空房)

아리따운 처녀는 하늘나라로 갔거늘

어리석은 총각은 빈 방만 지키도다.

(진제스님)

 

취산: 무엇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인가? 이것은 임제선사가 제기했으니, 반드시 임제선사에게서 궁구해야 할 것이다.

그저 무위진인(無位眞人)을 글자만으로 살핀다면 곧 무위(無位)란 ‘어떤 지위, 등급, 경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어느 분이 언급한 것처럼 ‘초발심에서 성불에 이르는 수행단계(42위, 52위, 57위)에 떨어지지 않고 성범(聖凡), 미오(迷悟), 상하(上下), 귀천(貴賤)’에 떨어지지 않는 자‘라고 해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여기에서부터이다.

 

무엇을 귀천(貴賤)이라고 하는가?

무엇이 귀한 것이고 무엇이 천한 것이기에 둘 다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귀천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서 다시 저 무위진인을 거론한다면 사상누각이라고 하겠다.

옛 선사들은 끊임없이 말하였다.

“귀하면 곧 천하고 천하면 곧 귀하다(貴卽賤 賤卽貴).”

귀함에 나아가지 않고서 어찌 천함에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천함을 밟지 않고서 어찌 귀함과 천함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드높은 수미정상을 향해 오르면서 무위진인을 역설한다면 그것은 매우 멀다. 깊고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서 또한 무위진인을 주창한다면 그것 또한 매우 멀다.

어째서인가?애초에 그래서는 저 임제선사가 거론하는 무위진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임제선사는 ‘무위진인이 모든 사람들의 면문으로 출입한다’고 했다. 어째서 진제스님이 말한 것처럼 저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지 않고 여전히 면문으로 출입하고 적육단에 머무는 것일까?

진제스님은 임제의 무위진인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타녀이귀소한거(奼女而歸霄漢去)

애랑유재수공방(獃郞猶在守空房)

아리따운 처녀는 하늘나라로 갔거늘

어리석은 총각은 빈 방만 지키도다.

 

그저 돌아가는 것만을 알아서는 마치 매가 아득히 남쪽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것만을 보았을 뿐, 두 발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임제선사는 말했다.

“적육단(赤肉團: 붉은 살덩어리) 상에 하나의 무위진인(無位真人)이 있어서 항상 모든 사람의 면문으로 출입한다. 아직 증험하지 못한 자는 살펴보고 살펴보라.”

 

적육단(赤肉團: 붉은 살덩어리) 상에 무위진인이 머문다는 것은 곧 모두의 육신 속에 저 무위진인이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총론적인 말이며 모두는 결국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 밖에서 달리 찾고 구하지 말라는 함축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바로 그때 한 스님이 나서서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無位真人)입니까?”

 

이 스님이 이렇게 묻는 의도가 어디에 있었을까? 알고 묻는 것인가? 모르고 묻는 것인가?

저 노장이 이렇게 묻는 것에는 분명 아는 것이 있었으리라. 그 아는 것이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물을 수 있었으리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묻는 스님을 흔히 간과하기 쉽다.

저 노장은 묻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애초에 임제선사가 무위진인을 제기한 것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노장이 나서서 물은 것이다.

“무엇이 무위진인인가? 선사가 그렇게 말해서는 내가 아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니면 이밖에 또 다른 무위진인이 있다는 것인가?”

 

오늘날에도 많은 선화자들이 무위진인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다. 평생을 오직 불법을 의지하며 정진하고 수행해온 저 노장과 무엇이 다르리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저 노장을 간과하고 오로지 임제선사의 입만을 바라보는 것인가?

이 무위진인의 화두를 꿰뚫으려면 반드시 저 노장스님부터 치밀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저 노장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조차도 모른다면 어떻게 임제선사와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저 노장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이제 임제선사에게 다가가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앙산흠(仰山欽) 선사는 평하기를 마치 ‘금시조가 날개로 바다를 쪼개고 곧장 용을 잡아 삼켰다가 바로 놓아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임제선사를 금시조에 비추고 저 노장스님을 용으로 비유한 것이다.

무엇이 저 용인가? 이는 오히려 은혜를 아는 의조(義鳥) 까마귀와 같다고 하겠다.

서대변(西臺辯) 선사는 말하기를 ‘이 스님은 그저 계하(季夏: 늦여름, 음력 6월)의 극심한 열기만을 알고 중동(仲冬: 한겨울, 음력 월)의 엄한 추위는 몰랐다.’라고 하였다.

계하(季夏)의 계(季)는 말(末)의 의미이다. 즉 여름의 석 달 가운데 마지막 달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째서 음력 6월인가? 봄은 임묘진(寅卯辰) 석 달이고 여름은 사오미(巳午未) 석 달로 이루어지는데, 음력 6월이란 곧 미(未)에 해당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정황을 깊이 살필 수 있을 때, 비로소 다음 구절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임제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와 붙잡고는 말하였다.

“말해라. 말해라.”

스님이 의논하고 헤아리려고 하자, 임제스님이 탁 밀치고는 말하였다.

 

당시에 저 스님에게 입을 떼게 했더라면 임제선사라도 수습하기 어려웠으리라. 어째서인가? 이것은 마치 각자의 허공을 가지고 깊이를 다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원래 서로를 비교할 수 없지만 서로 마주하는 처지에 떨어져서야 어찌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옛 사람은 평하기를 ‘펼친 것은 엉성했어도 거두는 것은 재빨랐다.’라고 하였다. 저 재빠른 솜씨는 곧 평소에 호랑이 수염을 뽑고 용의 뿔을 꺾는 역량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겠다.

 

마침내 임제선사는 저 스님을 밀쳐내고서는 말했다.

“무위진인이 무슨 간시궐(乾屎橛: 마른 똥막대기)인가?”

 

지금 임제선사는 ‘무위진인을 간시궐과 비교하지 마라. 무위진인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도 흔히 간시궐(乾屎橛: 마른 똥막대기)이라고 한 것을 간과하기 쉽다. 간시궐은 그저 뚱딴지같은 소리, 내지는 하찮고 쓸데없는 물건쯤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똥통을 힘차게 휘저으며 한 여름을 지내고서 가을의 문턱으로 향해 가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간시궐(乾屎橛)이다.”

 

무위진인을 제대로 살피려면 먼저 저 노장스님과 간시궐(乾屎橛)의 화두를 꿰뚫어야 하리라. 그런 연후에 임제선사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을 물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옛 사람의 뜻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거기에 부합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저 엉성하게 자신의 견해에 옛 사람의 구절을 꿰맞추어서는 재앙이 될 뿐이다. 그것은 마치 활을 쏘고 나서 나무에 박힌 화살 주변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과 같다.

 

앞에서 진제스님은 말하기를, ‘임제 선사는, 수좌가 형상 없는 참사람을 묻는데 멱살을 잡고, 천장(天章) 선사는 문득 때리니 대중은 두 큰 선사를 알겠는가? 두 선사의 용처(用處)가 좋은즉 아주 좋음이요, 아름다운즉 아름다우나, 자세히 점검컨댄, 멀고 멀도다.’라고 하였다.

 

임제선사가 저 스님의 멱살을 움켜잡고 천장선사가 문득 스님을 때려서는 참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재빨랐다고 하겠는데, 어째서 진제스님은 ‘멀고 멀도다’라고 했을까?

임제선사와 천장(?)선사 두 분의 안목이 아직 미흡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멱살을 잡고 후려치는 것이 좋기는 해도 그렇게 빼어나지는 못하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임제선사가 곧 방장실로 돌아간 것은 어떠한가? 한 때 덕산선사가 고개를 푹 숙이고 발우를 들고 방장실로 돌아간 것과 같은가? 다른가? 잘 살필 일이다. 임제선사가 말하는 무위진인이 곧 부처인가? 부처가 아닌가? 여래선, 조사선을 참구하고 안목을 거론하기는 쉬워도 어찌 살불살조(殺佛殺祖)라고 한 뜻을 드러내기가 쉬우리오.

 

끝으로 임제선사의 무위진인 화두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해 보겠다.

 

용의 뿔을 꺾고 호랑이 수염을 뽑는 솜씨에서

도리어 위태로움에 처한 것을

일찍이 설봉과 설두가 간파하였다.

흡사 백염적(白拈賊)과 같다고 함이여

손을 들지 않아도

청산은 스스로 빛을 잃고

저절로 세 걸음 뒤로 물러나리라.

무슨 간시궐이라고 함이여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끌었다. (취산)

 

취산 쓰다. 201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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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모검

글: 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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