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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林, 이것이 禪이다~

2015.05.29 10:36

향엄상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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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향엄이 대중에게 말하였다.

“이 일을 거론해서는 마치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서 입으로는 나뭇가지를 물고 발로는 가지를 밟지 않고 손으로는 가지를 잡지 않은 채로 있는데, 나무 아래에서 문득 어떤 사람이 묻기를,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하고 묻는 것과 같다.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면 그가 묻는 것을 거스르는 것이고 만약 그에게 대답한다면 또한 그가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와 같은 때를 당하여서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이때 호두 초상좌가 나와서 말했다.

“나무 위는 묻지 않겠습니다. 아직 나무에 올라가지 않을 때를 화상께서는 말해보십시오.”

향엄이 이에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香嚴示眾曰。若論此事。如人上樹。口銜樹枝。腳不踏枝。手不攀枝。樹下忽有人問。如何是祖師西來意。不對他又違他所問。若對他又喪身失命。當恁麼時作麼生即得。時有虎頭招上座出眾云。樹上即不問。未上樹時請和尚道。師乃呵呵大笑。

 

선(禪)을 살피는 것은 반드시 옛 사람의 자취와 지금 사람의 언행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한국의 진제스님은 이 화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

28세 때 가을에 “향엄상수화” 화두 관문(關門)을 뚫어 내셨다. 그리하여 종전에 동문서답(東問西答)하던 미(迷)함이 걷혀지고, 비로소 진리의 세계에 문답의 길이 열리었다.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향곡 선사께 바치시기를,

 

這箇柱杖幾人會

三世諸不總不識

一條柱杖化金龍

應化無邊任自在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하누나.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룡으로 화해서

한량없는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셨다.

"용이 홀연히 금시조(金翅鳥)를 만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이에 스님께서,

"당흉하여 몸을 굽히고 세 걸음 물러가겠다.[屈節當胸退身三步]"라고 답하자, 향곡 선사께서는 "옳고, 옳다."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다.

-------------------------------------------------

 

취산: ‘당흉하여 몸을 굽히고 세 걸음 물러가겠다’고 한 것은 저 진제스님의 일이다.

향엄상수화를 거론하면서 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극칙으로 삼아서야 어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향곡스님이 ‘옳고 옳다’라고 했어도 저 부(剖) 시자와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패기 넘치는 납자가 주장자를 얻고 푸른 용을 뽑아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도대체 향엄상수화의 화두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애초에 향엄스님이 상수화를 말한 것에는 그 뜻이 저 주장자에 있지 않았었다. 이것은 마치 저 설봉스님이 누가 오면 곧 나무공 세 개를 동시에 굴려서 묘한 작용을 보였어도 그 뜻이 전혀 저 나무공에 있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마조의 세 부자가 모두 달을 거론할 때, 홀로 소매를 떨치는 자가 있을 줄을 누가 알았으리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달에도 백천의 달이 있으니, 오직 무수하게 물속의 달을 건져본 자만이 진실로 달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저 주장자를 거론해서야 어찌 삼세의 모든 부처 밖의 일이리오. 저 검은 용의 턱 사이에서 구슬을 파내고 뿔을 꺾는 역량이 있다면 어찌 거론하지 못한다고 하리오. 관음과 미륵을 가려내고 무쇠 쓰레받기와 숯다리미를 제대로 가려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리오.

 

중국의 운문선사는 말하였다.

“주장자가 용으로 화하여 건곤(乾坤)을 삼켜버렸다. 산하대지(山河大地)를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대해서 벽암록에서 원오선사는 코멘트 하였다.

“그저 한 개(一條: 나무 한 가지) 주장자(拄杖子)가 있을 뿐이지만, 어떤 때는 용을 짓고 어떤 때는 뱀을 짓는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을까?”

忽然突出拄杖頭。元來只在這裏。爾不可便向拄杖頭上作活計去也。雲門以拄杖攛向雪峰面前作怕勢。雲門便以拄杖作鄨鼻蛇用。有時卻云。拄杖子化為龍。吞卻乾坤了也。山河大地甚處得來。只是一條拄杖子。有時作龍。有時作蛇。為什麼如此。

 

주장자가 용으로 화하여 건곤을 삼켜버렸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일찍이 감지행자에게 황벽스님은 남전의 회상에서 수좌로 있을 때에 말하였다.

“재물을 보시하는 것은 법을 베푸는 것과 같다.”

이런 말을 끄집어낼 수 있는 자라면 가히 건곤을 삼킨다고 하겠다.

무엇이 용을 짓고 뱀을 짓는다는 것인가?

이것을 분명하게 가려내기 전에는 아직 향엄상수화를 마쳤다고 하지 못하리라. 눈 밝은 납자라도 저 용과 뱀을 가려내기란 참으로 어려울 일이다.

 

벽암록을 끼고서 천변만화하며 묘한 작용을 보인다고 해도 저 금시조를 거론해서는 거칠고 정밀함을 자세히 살펴야지 엉성해서는 틀림없이 미끄러지고 말 것이다.

어찌 향엄상수화를 깊이 꿰뚫는다면 저 용에게 눈길을 빼앗길 일이리오.

향곡스님의 금시조의 물음에 진제스님은 ‘당흉하여 몸을 굽히고 세 걸음 물러가겠다(屈節當胸退身三步)’라고 하였는데, 향곡스님은 ‘옳고 옳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곧 저 진제스님 자신의 금룡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향곡스님이 옳고 옳다고 한 것이 어찌 저 '주장자를 가로 메고서 천봉우리로 돌아간다'는 구절을 일컫는 것이 아니리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하나의 먹물이 두 곳에서 용을 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향엄상수화를 꿰뚫은 안목이라면 어찌 용을 굴리고 뱀을 짓지 않으리오.

 

무엇을 참으로 용이라고 하겠는가?

백장야호의 일화에서 백장선사는 말하였다.

“오랑캐 수염이 붉다고 하려 하였더니 다시 붉은 수염의 오랑캐가 있었구나.”

이것은 금시조의 일이겠는가? 용의 일이겠는가?

 

저 금시조에 대해서는 그 근거가 벽암록에 있다.

<벽암록>에서 부(剖) 시자는 말했다.

“금시조왕(金翅鳥王)이 우주를 맡고 있으니, 어느 누가 머리를 내밀겠습니까?”

법원스님이 말했다.

“갑자기 머리를 내밀면 또 어떠하겠는가?”

부 시자가 말했다.

“매가 비둘기를 낚아채는 것과 비슷하겠지만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백골 앞에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겠습니다.”

법원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굴절당흉(屈節當胸)하며 세 걸음 뒤로 물러나겠구나.”

“수미좌(須彌座) 아래의 검은 거북이에게 이마에 거듭 점을 찍고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벽암록)

剖云。金翅鳥王當宇宙。箇中誰是出頭人。遠云。忽遇出頭。又作麼生。剖云。似鶻捉鳩。君不信。髑髏前驗始知真。遠云。恁麼則屈節當胸退身三步。剖云。須彌座下烏龜子。莫待重遭點額回。

 

이 구절은 글자를 살피기가 매우 어려워서 설령 누군가가 잘못 말해도 제대로 가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내민다는 것은 스스로 고위(孤危)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무엇이 ‘백골 앞’의 뜻인가?

호랑이가 뿔을 얻는 시절이라고 하겠다.

굴절당흉(屈節當胸)이란 신하의 예법이 될 수는 있어도 왕의 거동은 아니다. 무엇을 굴절당흉이라고 하는가? 굴절(屈節)이란 마디를 꺾는 것을 말한다. 즉 허리를 꺾는다는 것이다. 당흉(當胸)이란 가슴과 마주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왕 앞에 서 있는 처지라는 것이다.

수미좌(須彌座) 아래의 검은 거북이란 곧 부처의 연화좌를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거북을 일컫는다. 거듭 점을 찍고서 어디로 돌아가는가? 점을 찍는다는 것은 부처를 뽑는 시험에 낙방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자가 결국에는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만약 귀신굴에서 그저 눈알을 굴려서는 어찌 차가운 곳을 벗어나겠는가? 이 일을 평생 살펴도 투철하게 살펴가지 않으면 여전히 귀신굴에 앉아서 기다리는 처지를 면한 것이 아니라고 하리라.

 

스승의 덕과 지혜를 능가하지 못하면 도리어 절반으로 감한다고 했다.

모름지기 ‘굴절당흉(屈節當胸)하며 세 걸음 뒤로 물러나겠구나.’라는 구절을 잘 풀어낼 수 있어야 좋은 안목이라고 하겠다. 법원스님이 이렇게 말한 것은 곧 눈멀고 귀먹은 자가 결국 귀신굴을 떠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심경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저 부 시좌는 그러한 염려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부 시자는 말했다.

“수미좌(須彌座) 아래의 검은 거북이에게 이마에 거듭 점을 찍고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구절은 살피기가 매우 어렵다. 나 역시 여러 해를 살폈어도 일 밀리의 어긋남을 메울 수가 없었다.

이제 이렇게 코멘트하겠다.

“점찍으면 오지 않고 오면 점찍지 않는다.”

 

저 검은 거북을 살피고 살핀다면 원래 이밖에 다른 것이란 없다는 것도 알 것이다. 이것을 살필 수 있다면 저 부 시자가 원래 저 임제종의 자손이라는 것도 간파하리라.

모름지기 저 부 시자와 같아야 비로소 용과 뱀을 가려내는 솜씨가 있다고 하겠다.

 

호두 초상좌가 나와서 말하기를 ‘나무 위는 묻지 않겠습니다. 아직 나무에 올라가지 않을 때를 화상께서는 말해보십시오.’라고 하니, 향엄이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저 향엄의 웃음은 어떤 웃음일까? 칭찬인가? 욕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송하겠다.

 

광전절후(光前絕後)의 소식을 물으니

도리어 나무에 오르기 이전을 묻는다.

향엄의 웃음 속에

독기가 묻어남을 누가 알았는가.

어째서 도리어 나무 이후의 일은 묻지 않는가.

 

저 주장자에 대해서 이렇게 송을 붙인다.

 

하나의 주장자가 아득히 남방으로 날아가서는

용이 안개를 뿌리고 천지가 혼연하다.

용이 금시조를 만나는 것을 몹시도 꺼렸는데

결국에 천지를 놀라게 하는 기틀을

몸소 다른 곳에서 얻는다고 하리라.

 

옛 사람은 송하였다.

 

하하! 하며 크게 웃어서 (바늘)송곳을 없애고

나무에 오름이 어찌 오르기 이전과 같으리오.

향엄이 많은 기량을 부렸어도

옆에서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면지 못하리라. (불혜 천)

呵呵大笑沒針錐。上樹何如未上時。

任使香嚴多伎倆。傍觀不免為攢眉。(佛慧泉)。

 

굽은 재주가 다방한 늙은 고추(古錐: 옛 송곳)여

어찌 나뭇가지 상에서 다시 살아난 나뭇가지를 감당하리오.

훌륭한 말에게 채찍의 그림자를 보이는데

흙을 좇아서는 또한 사자새끼가 아니다. (보녕 용)

曲設多方老古錐。那堪枝上更生枝。

好如良馬窺鞭影。逐塊且非師子兒。(保寧勇)。

 

취산 쓰다. 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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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456 2015.06.01 15:40
    벽암록을 좋아하는 거사입니다. 우연히 스님 글을 읽으면서 '금시조'관련된 내용에 조금 수정이 필요한 것 같아서....
    아직은 선어록을 잘 몰라서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아무튼 제가 생각하는 자구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흥양부시자가 말했다. “금시조왕(金翅鳥王)이 하늘에 있는데, 어느 누가 머리를 내밀겠는가?”
    원록공이 말했다. “ 갑자기 머리를 내밀면 어떻습니까?”
    흥양부시자가 말했다. “송골매가 비둘기 잡는 것과 같다는 걸 그대는 믿지 않는군.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원록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조를 굽히고 두 손을 가슴에 모우고 세 걸음 물러나겠습니다.”
    흥양부시자가 말했다. “법좌(法座) 밑에 있는 우매한 학인들이여 두 번씩이나 머리를 다치지 말라.”

    특히 '오귀자 (烏龜子)'란 단어에 대한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림의 용어로 원래 설법단(法座) 다리에 조각된 검은 거북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후 법좌 아래에 있는 우매무지한 참선학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뜻이 바뀌었다. 종용록(從容錄) 제44칙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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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산 2015.06.04 09:02

    벽암록을 좋아하는 거사입니다. 우연히 스님 글을 읽으면서 '금시조'관련된 내용에 조금 수정이 필요한 것 같아서....

    아직은 선어록을 잘 몰라서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아무튼 제가 생각하는 자구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흥양부시자가 말했다. “금시조왕(金翅鳥王)이 하늘에 있는데, 어느 누가 머리를 내밀겠는가?”

    원록공이 말했다. “ 갑자기 머리를 내밀면 어떻습니까?”

    흥양부시자가 말했다. “송골매가 비둘기 잡는 것과 같다는 걸 그대는 믿지 않는군.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원록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조를 굽히고 두 손을 가슴에 모우고 세 걸음 물러나겠습니다.”

    흥양부시자가 말했다. “법좌(法座) 밑에 있는 우매한 학인들이여 두 번씩이나 머리를 다치지 말라.”

     

    특히 '오귀자 (烏龜子)'란 단어에 대한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림의 용어로 원래 설법단(法座) 다리에 조각된 검은 거북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후 법좌 아래에 있는 우매무지한 참선학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뜻이 바뀌었다. 종용록(從容錄) 제44칙 참조.

     

    대답:

    요즘과 같은 세상에 선(禪)을 살피고 화두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희유한 일인데,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서로 마주해서는 좀 더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글은 벽암록의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참고로 기존의 번역본들에 흡족하지 못하여서 몇 년 전에 직접 벽암록 전체를 번역해보았습니다.

    먼저 벽암록을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법원스님이 물었다.

    “사갈(娑竭) 용왕이 바다에서 나와서는 건곤(乾坤)이 진동한다. 적면상정사(覿面相呈事)은 어떠한가?”

    부시자가 말하였다.

    “금시조왕(金翅鳥王)이 우주를 맡고 있는데, 어느 누가 머리를 내밀겠습니까?”

    법원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갑자기 머리를 내밀면 또한 어떠하겠는가?”

    “매가 비둘기를 낚아채는 것과 비슷하겠지만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백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굴절당흉(屈節當胸)하고서 세 걸음 뒤로 물러나야겠구나.”

    “수미좌(須彌座) 아래의 검은 거북이 거듭 이마에 점을 찍고 돌아가서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豈不見。興陽剖侍者。答遠錄公問。娑竭出海乾坤震。覿面相呈事若何。

    剖云。金翅鳥王當宇宙。箇中誰是出頭人。遠云。忽遇出頭。又作麼生。剖云。似鶻捉鳩。君不信。髑髏前驗始知真。遠云。恁麼則屈節當胸退身三步。剖云。須彌座下烏龜子。莫待重遭點額回。

     

    먼저 거사님의 번역을 보겠습니다.

     

    흥양부시자가 말했다. “금시조왕(金翅鳥王)이 하늘에 있는데, 어느 누가 머리를 내밀겠는가?”

    원록공이 말했다. “ 갑자기 머리를 내밀면 어떻습니까?”

    흥양부시자가 말했다. “송골매가 비둘기 잡는 것과 같다는 걸 그대는 믿지 않는군.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원래 완록공(遠錄公)이란 서주 부산 법원 원감선사(舒州浮山法遠圓鑑禪師)의 호입니다. 그리고 기현선(葉縣省)선사에게서 법을 받았습니다.

    ‘髑髏前驗始知真’의 구절을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라고 했는데, 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직 죽지는 않았으며 이제 막 죽음에 임박했다는 의미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은 구체적으로 누구의 죽음을 가리킵니까? 이것을 밝힐 수 있다면 비로소 백골도 거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취산이 말하는 백골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미 죽어서 피와 살이 흩어지고 뼈만이 온전히 남는 것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이제 다시 묻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것과 백골이 같겠습니까?

     

    님은 또한 번역하시길, '그렇다면 지조를 굽히고 두 손을 가슴에 모우고 세 걸음 물러나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원문은 곧 ‘恁麼則屈節當胸退身三步’입니다.

    문제는 누가 세 걸음을 뒤로 물러났느냐 입니다. 저 ‘세 걸음을 물러났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가 참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자세히 살피야 할 것입니다.

    즉 성문, 연각, 보살, 부처, 조사 가운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조를 굽히고 두 손을 가슴에 모우는 자’는 어떤 자이겠습니까? 왕입니까? 신하입니까? 보살입니까? 부처입니까? 납승입니까? 선사입니까?

     

    님은 또한 번역하였습니다.

    흥양부시자가 말했다. “법좌(法座) 밑에 있는 우매한 학인들이여 두 번씩이나 머리를 다치지 말라.”

     

    원문은 ‘須彌座下烏龜子 莫待重遭點額回’입니다.

    법좌 밑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법좌를 말하겠습니까?

    여기에서는 분명하게 ‘수미좌 아래’라고 했으니, 매우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드러냈다고 하겠습니다. ‘우매무지한 참선학인’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마치 어제의 원록공을 일컫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데, 구체적으로 어제의 완륵공이 어떠했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오늘의 원록공은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두 번씩이나 머리를 다치지 말라’고 했는데, ‘點額’란 원래 ‘이마에 점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저 잉어가 용문을 넘지 못하고 바위에 부딪쳐서 이마를 붉은 점이 생기는 것처럼 당나라 시대에 과거에 낙방을 하면 성벽에 이마를 세 번 찧고 피를 내고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回’라는 글자를 살피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글자를 말끔하게 꿰뚫을 수 있어야 비로소 저 부시자를 알고 원록공을 안다고 하겠으며 이상의 질문들을 모조리 꿰뚫는다고 하겠습니다.
    나아가서 '莫待'를 살필 수 있어야 참으로 종문의 소식을 얻는다고 하겠습니다. 

     

    종용록은 원래 제목은 ‘萬松老人評唱天童覺和尚頌古’입니다. 제44칙에서는 오귀자(烏龜子)에 대해서 오직 ‘須彌 座下烏龜子 莫待重教點額痕(再犯不容)’를 싣고 있을 뿐입니다.

    어째서 자라가 아니라 거북일까요? 어째서 푸른 색이 아니라 검은 색일까요? 그렇다면 저 오귀자는 의오(義烏)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종용록에서 만송스님이 ‘재범은 허락지 않는다.’라고 코멘트를 붙였는데, 무엇이 첫 번째 범한 것이고 무엇이 두 번째 범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이것을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직 간택함을 꺼린다.”

    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

     

    여기에 대해서 30년 동안 아무도 묻는 자가 없었는데, 한 스님이 물은 것입니다.

     

    이 스님은 말했다.

    “이것도 오히려 간택함입니다.”

    조주스님이 말했다.

    “전사노야, 어디가 간택함인가?”

    종사의 안목이라면 반드시 이와 같음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은 마치 금시조(金翅鳥)가 바다를 쪼개고 들어가 곧바로 용을 집어 삼키는 것과 같다.

    這僧道此猶是揀擇。趙州道田厙奴。什麼處是揀擇。宗師眼目。須至恁麼。如金翅鳥擘海直取龍吞。

    (벽암록 가운데에서)

     

    무엇이 금시조이고 무엇이 용이겠습니까?

    저 오귀자를 그저 ‘우매한 학인’이라고 한다면 저 용은 무엇이겠습니까?

    벽암록 전체를 뒤져서 저 용에 대해서 분명함을 얻기란 결코 쉽지 않는 일입니다.

    예로부터 용과 뱀을 가려내는 솜씨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떤 경계가 용의 경계이고 어떤 경계가 뱀의 경계이겠습니까?

    이것을 모조리 꿰뚫을 수 있다면 벽암록이 바로 눈앞에 있고 또한 옛 사람이 가까이에 분명 계실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주해 여러 날 동안 함께 갈등의 길을 걸어야 비로소 의심을 떨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취산 합장


취모검

글: 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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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백장의 들오리2 2015.04.20 운영자 2015.04.25
5 백장의 들오리(野鴨子)1 2015.04.20 운영자 201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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